나는 자부심 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자부심 없는 사람을 안 좋아한단 얘긴 아니지만, '저 사람은 자부심이 강하구나'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을 보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그런 사람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는 자부심은, 본인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느 학교를 나왔다거나(다른 경우는 제외해야 하니 '명문'이라고 찝어서 얘기하자) 어느 지역에 산다는 것(역시 합당한 경우가 있으니 '부촌'이라고 말해버리자)만이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라면 말릴 필요야 없지만,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어느 땐 상당히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잘 살지도 못했고, 초중고대 포함해서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개중 명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박정희) 각하의 딸 박근혜 양(이었을 한나라당 대표)이 다녔다는 그곳은, 그래서 그녀가 재학한 당시 고위 관료들의 딸들이 대거 다녔다고 한다. 때문에 저절로 명문이란 딱지가 붙은 그 학교엔 들어오는 돈이 많았던 모양이고.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셀수록 학교는 외관상으로 발전하고 뽀대 났겠지. 아마도 당시엔 흔치 않았을, 그녀들이 쓰고 다녔다는 '프랑스에서 공수한 베레모'는 그들 자부심의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그 때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고등학교가 평준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듯 우리에게 늘 "너희 선배들은 너희와 달랐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길 끊임없이 원했으나,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도무지 자부심 따윈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더라. 나도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학교 자랑을 하긴 했지만, 넓은 뒷동산과 본관 앞 잔디밭과 가을이면 황금빛 낙엽을 눈처럼 뿌려대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뿌듯해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얘기하는 종류의 자부심은 도무지 생기지도 않고 가져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 학교에 계셨다가 이 '초라한' 아이들이 다니는 90년대 중반 다시 학교에 돌아온 교장 선생님은 "예전엔 어머니들이 학교에 많이 찾아왔는데 왜 여러분의 어머니는 오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우리에게 애교심 하나로 학교 건물 신축공사에 얼마의 기부금을 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애국조회 시간 운동장에서 "10만원 이상 내는 사람은 건물 머릿돌에 이름을 새겨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날 수업을 한 어느 선생님은 "이름 새기고 싶은 사람은 건물 다 지어지면 밤에 몰래 정이랑 망치랑 가져와서 직접 새기면 되지." 란 이야길 하며 우리와 의미있는 웃음을 나누었고, 반면에 또다른 선생님은 "예전이나 돈많은 집 자식들이었지, 지금은 너네 사는 곳이 다 슬램가인데 ..."라는 솔직하지만 모욕적인 말을 하기도 했지.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게 할 교육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전원이 다 일어나 대기하고 있다가,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선 순간 45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선배들은 90도 각도로 인사했던 것이, 우리 때 완화된 것이라 한다) "안녕하십니까!" 를 외치고, 수업이 끝나면 또 모두 일어나 "감사합니다!"를 외쳐야 했던 것을, 학교는 아름답고 예의바른 전통이니 자랑스러워하라고 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보다는 아까 말한 교실밖의 느티나무가 백만 배는 자랑스러웠다. 영어와 수학을 성적대로 A-B-C-D반으로 나누어, 그 시간이 되면 대학처럼 강의실을 옮겨다니며 수업하는 시스템을 뿌듯해하길 바라는 모양이었지만, A반에 있는 아이들은 그랬을지 알 수 없으나 D반에 모여 인생낙오자 취급받던 아이들은 뿌듯함은커녕 자포자기하거나 쪽팔려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논' 친구들은 나름대로 그런 유희에서 자부심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은 그저 공부도 못하는데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부류일 뿐이었다.
수녀회에서 하는 학교이기에, 수녀회가 있는 전세계 곳곳에 같은 영문 이름의 학교가 있다는 우리 학교. 그래서 졸업 후 세계로 나가도 우연히 발견하면 서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으니 신청하는 게 좋을 거라던 졸업반지를 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졸업한 후 느티나무는 학교의 증축공사로 베어져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그러나 나는 자부심은, 본인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느 학교를 나왔다거나(다른 경우는 제외해야 하니 '명문'이라고 찝어서 얘기하자) 어느 지역에 산다는 것(역시 합당한 경우가 있으니 '부촌'이라고 말해버리자)만이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라면 말릴 필요야 없지만,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어느 땐 상당히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잘 살지도 못했고, 초중고대 포함해서 명문이라 불리는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지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개중 명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박정희) 각하의 딸 박근혜 양(이었을 한나라당 대표)이 다녔다는 그곳은, 그래서 그녀가 재학한 당시 고위 관료들의 딸들이 대거 다녔다고 한다. 때문에 저절로 명문이란 딱지가 붙은 그 학교엔 들어오는 돈이 많았던 모양이고.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이 셀수록 학교는 외관상으로 발전하고 뽀대 났겠지. 아마도 당시엔 흔치 않았을, 그녀들이 쓰고 다녔다는 '프랑스에서 공수한 베레모'는 그들 자부심의 결정타가 아니었을까.
그 때의 영광을 잊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고등학교가 평준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듯 우리에게 늘 "너희 선배들은 너희와 달랐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길 끊임없이 원했으나,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도무지 자부심 따윈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더라. 나도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학교 자랑을 하긴 했지만, 넓은 뒷동산과 본관 앞 잔디밭과 가을이면 황금빛 낙엽을 눈처럼 뿌려대는 커다란 느티나무를 뿌듯해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얘기하는 종류의 자부심은 도무지 생기지도 않고 가져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 학교에 계셨다가 이 '초라한' 아이들이 다니는 90년대 중반 다시 학교에 돌아온 교장 선생님은 "예전엔 어머니들이 학교에 많이 찾아왔는데 왜 여러분의 어머니는 오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우리에게 애교심 하나로 학교 건물 신축공사에 얼마의 기부금을 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애국조회 시간 운동장에서 "10만원 이상 내는 사람은 건물 머릿돌에 이름을 새겨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날 수업을 한 어느 선생님은 "이름 새기고 싶은 사람은 건물 다 지어지면 밤에 몰래 정이랑 망치랑 가져와서 직접 새기면 되지." 란 이야길 하며 우리와 의미있는 웃음을 나누었고, 반면에 또다른 선생님은 "예전이나 돈많은 집 자식들이었지, 지금은 너네 사는 곳이 다 슬램가인데 ..."라는 솔직하지만 모욕적인 말을 하기도 했지.
학교는 학생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게 할 교육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전원이 다 일어나 대기하고 있다가,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선 순간 45도 각도로 몸을 숙이며(선배들은 90도 각도로 인사했던 것이, 우리 때 완화된 것이라 한다) "안녕하십니까!" 를 외치고, 수업이 끝나면 또 모두 일어나 "감사합니다!"를 외쳐야 했던 것을, 학교는 아름답고 예의바른 전통이니 자랑스러워하라고 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보다는 아까 말한 교실밖의 느티나무가 백만 배는 자랑스러웠다. 영어와 수학을 성적대로 A-B-C-D반으로 나누어, 그 시간이 되면 대학처럼 강의실을 옮겨다니며 수업하는 시스템을 뿌듯해하길 바라는 모양이었지만, A반에 있는 아이들은 그랬을지 알 수 없으나 D반에 모여 인생낙오자 취급받던 아이들은 뿌듯함은커녕 자포자기하거나 쪽팔려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논' 친구들은 나름대로 그런 유희에서 자부심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은 그저 공부도 못하는데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부류일 뿐이었다.
수녀회에서 하는 학교이기에, 수녀회가 있는 전세계 곳곳에 같은 영문 이름의 학교가 있다는 우리 학교. 그래서 졸업 후 세계로 나가도 우연히 발견하면 서로 그렇게 반가울 수 없으니 신청하는 게 좋을 거라던 졸업반지를 나는 신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졸업한 후 느티나무는 학교의 증축공사로 베어져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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