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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검은 천 2006/04/21
  2. 유년 2005/10/31
나는 분노가 담긴 고성을 싫어한다.
누군가 나와 상관없는 일로 화를 내고 있어도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고
정도가 심하면 패닉 상태까지 치닫곤 한다.

어제 아침
엄마가 동생과 관련된 일에 걱정했고
그걸 못마땅하게 받아들인 동생이 화를 내서
둘이 다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다툴 일도 아닌데 고성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싫어 샤워하며 울었다.

하루종일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듯 했다.
저녁에 엄마는 카레를 만들어 놓았다고
늘 그렇듯 명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고
나도 명랑하게 빨리 먹고 싶다고 이야기하곤
카레를 먹으러 가지 않고 애인을 만나
맥주를 두 잔 마셨고. 애인의 손을 잡고서야
벼랑에서 떨어지는 걸 멈춘 기분이 되었다.





내가 고성에 병신처럼 민감한 원인이 된
유년기의 한 부분만큼이나 소스라치게 싫은 때는
이십 대의 어느 날들.
몇 년에 걸친 괴로웠던 그 때.
떠올리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고 말은 하지만
그 때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메일들을
차마 삭제하진 못하고 메일함에 담아두었다.
아직은 열어보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 지금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초연할 수 있을 때 조용히 열어보리라
꼭꼭 봉해두었는데

좀전에 한참을 접속하지 않던 엠파스에 로긴했더니
오랫동안 로긴하지 않았기에
메일 계정이 휴면상태 되는 것을 넘어
갖고 있던 메일이 아예 삭제되었다는 안내 문구가 뜬다.

모두. 사라졌다.
어차피 득 될 것 없는 기억 이참에 잘 됐네-
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텐데
나는 그 때 내가 갖지 못한 행복할 권리에 이어
온전히 기억할 권리조차 빼앗긴 것만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픈 부분을 검은 천으로 가려놓고
모른 체 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사는 게 아닌데. 그리고

전쟁처럼 사는 동안
폭풍처럼 봄이 가고 있다.




2006/04/21 21:21 2006/04/21 21:21
일요일 낮, 전화 한 통을 기다리다 잠시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는 집을 향해 걷고 있었고, 골목을 돌아 가던 중 아는 이들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들의 손엔 내 책들이 한아름씩 들려 있었다. 버리러 가는 길이란다. 무슨 책을 버리려는 것인지 살펴보던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릴 적 엄마가 사다준 북유럽, 프랑스, 러시아, 중국 동화집 같은 책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그런 책들을 한아름 버리고 돌아와 더 가지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당장 그만 두라며 소리치고 이미 버렸다는 책을 찾으려 했으나 벌써 청소차가 수거해 가서 찾아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글피 울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한없이 슬퍼져 통곡을 했다. 내 유년이 날아가 버렸어- 하며 펑펑 울다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 생각했다. 사실 나의 유년은 남들이 보기엔 어쩔 지 모르겠으나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름답기만 한 기간은 아니었다. 과거는 늘- 더욱이 유년 시절 같은 경우엔- 미화된 모습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라지만 나의 유년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끔찍했다. 겉으로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사실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어졌고, 나는 폭력에 늘 노출되어 있었으며, 강박증에 시달렸고, 신경질적이었고, 악바리였고, 성에 일찍 눈떴고, 주로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짓말을 했고, 도둑질을 했고, 담임선생님이 걱정할 정도로 표정 없이 우울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내게 엄마가 사다준 책들, 특히 먼 나라 동화책들은 그 어떤 친구나 어른보다 나를 위로해주었다 . 백과사전보다 먼저 동화책을 통해 바라본 다른 나라들의 풍경은 내게 환타지였다. 나는 동화를 읽으며 핀란드의 자작나무와 별을 동경했고, 저주 때문에 눈물 대신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어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미친듯이 웃을 수밖에 없던 어느 왕비의 삶을 진심으로 슬퍼했다. 책을 덮은 현실 속의 친구들은 새엄마에게 맞은 자리가 지렁이처럼 솟아오른 동갑내기 친구와 엄마가 미군에게 시집가 버림받은 어린 여자아이와 그게 자위란 것도 모른 채 단지 '기분이 좋아지는 거'라며 내 앞에서 자위를 하곤 했던 그 아이의 배다른 어린 오빠와 어른들이 '양색시'라 부르던 옆집 아주머니였고, 책을 펼치면 개똥지빠귀와 구두장이 이반과 영리한 당나귀와 빛을 뿜는 깃털을 가진 불새와 죽음을 알리려 구슬피 흐느끼는 요정 반시와 산 속의 거인이 친구가 되었다.

나의 유년은 현실뿐만 아니라 동화 속 세계를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책이 없는 유년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이 슬펐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 그게 꿈이란 사실을 알았는데도,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눈물이 난다. 꿈에서 나는 정말 서럽게 통곡했다. 내 유년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낮에 그런 꿈을 꾸고 깨달은 것은, 아직 내가 유년의 내 모습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벗어날 수는 없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스물 여덟 살, 아직도 똑바로 바라보기 두려운 내 유년을, 나는 언제쯤 그 모습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2005/10/31 06:43 2005/10/31 06: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