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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샘 2003/12/01
1.
월요일 10시 수업이 휴강인 줄 알았다. 왜 그렇게 착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과제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주일이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휴강이 아니었고, 부랴부랴 과제를 하느라 집에 가지 않았다. 물론 그 수업 과제만 하느라 밤을 새고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엉망이긴 하지만 겨우 끝냈고, 지금은 역시 잊고있던 레포트를 쓰러 학교 앞 피씨방에 와 있다.

2.
학교 앞에 새로 생긴 피씨방은 역시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곳답게 깔끔하다. 언제나 피씨방에 오면 헤드셋을 쓰지 않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웠는데 (그 소음이란 정말 대단하다), 지금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볼륨을 낮추고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만족스럽다. 내 바로 옆에 앉은 두 사람도 매우 작은 소리를 내며 스타 크레프트를 하고 있다.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다리를 쭉 뻗어 앉을 수 있게 받침대를 만들어 놓은 것도 마음에 든다. 나는 오래 앉아 있으면 무릎이 심하게 쑤시곤 하는데 지금은 편한 자세로 앉아있다.

3.
다른 빈 자리가 많은데 굳이 사람들이 몰려 앉아있는 이 자리를 준 이유가 궁금했는데, 가만보니 지금 내가 앉은 자리의 모니터 위에 작은 캠이 얹혀있다. 아마도 새벽에 들어오는 내가 화상채팅을 하러 온 것처럼 생각되었나 보다.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만, 굳이 이렇게 손님을 몰아서 앉힐 이유가 그것밖에 또 있을까 싶다. 주위를 둘러보니 캠이 있는 자리는 지금 이 자리 말고 몇 개 안 될 뿐더러, 다 이 주위이다.

4.
화상채팅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레포트를 쓰러 와놓고 정작 쓰진 않고 있다. 좀전엔 손님글방에 오랜만에 답글을 달았고, 문화뒷간에 기형도의 시를 올렸다. 아는 사람들의 홈페이지에도 들어가봤다. 도무지 레포트 쓸 마음이 나지 않는다. 설상가상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이 점점 굼떠지고 있다. 이따가 4시간짜리 공강 시간에 쓰면 된다..... 라는 생각이 자꾸 들려고 한다. 그 시간에 나는 동아리방 소파에서 잘 게 뻔하다.

5.
동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맨날 운동화에 잠바를 걸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고등학생으로 많이 본다. 하이힐이나 몸에 딱 맞는 숙녀스런 옷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복장을 하기란 수고스런 일이다. 아침에 단장하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종일 자세도 불편하다. 하도 하이힐을 신지 않아 버릇해서, 언젠가 무슨 행사 도우미를 하느라 정장에 힐을 신고 나온 날, 나는 비틀거리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다 주차해있던 자동차에 들고있던 음료수를 쏟아버리기도 했다.

6.
사실 내 나이에 누군가 고등학생으로 보아준다는 건 기분좋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게 딱히 기분이 좋기만 한 일은 아닌지라 며칠 전에 파마를 해 봤다. 그런데 학교에 오면서 마을버스 요금통에 천원짜리를 넣자 기사 아저씨가 거스름돈을 주며 "고등학생?" 이라 물어본다. 나는 이제 파마를 한, 불량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7.
엄마가 거래처에서 주었다는 라이터를 동생과 나에게 하나씩 나눠주셨다. 지포 라이터와도 사뭇 다르게 생긴 이 라이터는, 뚜껑을 열면 전면의 심볼(자동차 벤츠의 그것과 흡사하다)에 파란 불이 들어온다. 게다가 불을 켠 상태로 두면 불꽃이 파란색에서 이내 선명한 초록색으로 변한다. 쉬익ㅡ 소리를 내면서. 마치 외계인의 소지품같은 이 라이터를 가지고 놀다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뒷면에 붙어있는 스티커가 그것인데, 빨간 테두리가 그어진 노란 종이엔 이렇게 쓰여있다. "자체 검사 합격". 스티커를 보며 한참 웃었다. 자체 검사라니, 대체 어떤 검사를 했을까 궁금하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든다.

8.
좀전에 메일을 확인하는데 '이 메일 읽고 생각해보고 전화하세요..죄짓고는 못삽니다' 란 제목의 메일이 와 있다. 스팸으로 치부하려 하다가 내용이 궁금해서 열어보니 역시나 성인 사이트 광고다. 죄 짓고는 못 산다. 당신 죄 졌다.

9.
'한국 현대사' 란 수업 시간에 '욕' 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교수님은 풍채가 좋으신, 아주 근엄하신 분인데 예의 그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경을 칠 놈', '주리를 틀 놈', '오라질 놈' 같은 욕의 공통점은 국가에서 내리는 형벌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욕을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는 아주 나쁜 놈이다, 국가에서 널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웃음이 나와서 혼났다.

10.
학교 경사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리 학교엔 얼마 전에 다른 곳에선 쉽게 보기 힘들 '야외 에스컬레이터' 란 게 생겼다. 실외에 유리관을 만들어 에스컬레이터를 놓은 것인데, 학교 맨 아래에서 미술관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예전보다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저녁에 동아리방에서 과제를 하면서 "하기 싫다" 고 투정을 부리자 함께 있던 친구가 한 마디 한다. 그 친구는 학점이 모자라 제 때 졸업을 하지 못하고 9학기 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사실 그 에스컬레이터는 공사비용이 부족해 완공되지 못 할 위기에 처해 있었단다. 그러다 자기가 9학기 째 등록금을 낸 순간 총장이 "됐어! 부족했던 공사비용이 이것으로 해결됐다!" 라며 기뻐했단다. 그러니 나의 힘으로 또 다른 곳에 에스컬레이터를 놓고 싶다면 과제를 하지 않아도 좋단다. 잠시 학교 곳곳에 거미줄처럼 놓인 에스컬레이터를 상상하다가 서둘러 과제를 끝냈다.

11.
그러면 뭐하나. 다른 수업 레포트를 아직 안 쓰고 있는데. 벌써 써내려온 글이 이만큼이다. 이 글을 쓸 시간에 레포트를 썼대도 많이 썼겠다. 아아 졸려라.

12.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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