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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른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 - 윤성희 2003/01/21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언젠가부터 나는 이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만약 여우가 내게 와서 말을 건넨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던 것이다.

"네가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못하겠지. 날 길들여줘!"
"그러지 마."
"왜?"
"그러다 내가 늦으면 화를 낼 거잖아."


나는 누군가 내게, 애초에 기대란 것을 하지 않아주길 바란다. 내가 네 시 정각에 나타날 것이란 기대, 내가 상냥하고 성의있게 대화할 것이란 기대, 내가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맞이할 것이란 기대 같은 것들을 나는 부담스러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뜻대로 내 행동을 예상하고 있다가 내가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 하는 행동을 하면 화를 내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를 내는 강도는 기대했던 강도와 비례하곤 한다.

그래서 내겐 여우의 저 말도, 날 기다리는 연인의 애교있는 말로 들리기보단 "내가 이렇게 안절부절 못 하며 널 기다리고 있는데 네가 늦으면 얼마나 화가 나겠니?" 라는 협박의 말로 들렸던 게다. 그건 아마 내가 남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무살 무렵 나의 남자친구는 늘 나를 기다리는 일에 지쳐있는 듯 했다. 나는 꼭 약속 시간에서 십 분 십오 분씩 늦었으며, 어떤 때엔 삼십 분을 넘겼고 어느 날은 한 시간 후에 도착해 미안하단 얘길 하고는 했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라는 말을 하고는 했고, 나는 매번 미안해 하면서도 매번 약속 시간을 어겼다.

우리가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나서, 만들어만 놓았지 제대로 쓴 적이 없던 이메일 계정에 로그인한 나는 몇 달 전, 그러니까 우리가 연애 중이던 때에 남자친구가 보낸 메일을 뒤늦게 읽게 되었다. 학교가 달랐던 우리는 방학 때 서로의 학교 도서관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는데 (법학과 학생이던 그는 두꺼운 책을 펴고 공부를 했고, 나는 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소설책을 읽었다), 아마 그 날은 우리 학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나 보다. 그리고 여전히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도서관 컴퓨터로 메일을 썼나 보았다. 내용은 역시 "오늘도 늦는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지......" 식의 내용이었다.

그 때는 내가 그렇게 늘 늦는 것이, 그 친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하면서도, 그 친구의 마음이 어땠을 거란 이해는, 솔직히 잘 하지 못 했다. 나는 그에게 날 기다리는 30분의 시간이 그저 단순한 30분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네 시에 나타날 거라 기대하던 그가 네 시 십 분이 되고 이십 분이 되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 지..... 에 대해선 정말이지 그의 심정을 까맣게 몰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나를 항상 기다리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기다림이란 내가 예전의 남자친구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적이 있다...... 란 사실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이 될 정도로 지속적이고 강력한 것이었기에, 나는 가끔 내가 벌을 받고 있는 건가 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를 하루종일 기다리다 잠이 든 적도 있었고,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것 뿐만 아니라 전화나 메일함에서도 나는 늘 그를 기다리는 입장이었고, 심지어 그는 나에게 완전히 온 적이 한 번도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때부터 나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는데, 이건 좀 우스운 일이지만 여전히 나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드는 여자이기 때문에, 나의 친구나 선배, 그리고 많은 지인들을 만날 때 내가 그들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한다. 기다리게 하느니 내가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건 그들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필요 이상의 기대(그는 날 만날 때 지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식의)는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이 연애라는 상황이 되어, 내가 여우가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달라져서, 네 시까진 온갖 기대로 붕붕 떠 있다가 네 시가 넘어가면 풀이 죽거나 슬퍼지거나 한다. 때로는 내가 한 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연애를 한 적이 있다는, 특수한(?) 경험에서 비롯된 '기다림 거부 증세' 가,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을 만나며 나타난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나는 되도록 그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란 사실을 떠나 오직 '늘 제 시각에 나타날 것이란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으려 한다. 더욱이 나란 인간부터 약속 시간에 늦기로 유명한 여자가 아닌가! 나 자신이 언제나 늦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면서 상대방이 늦는 것만 탓한다면 우스꽝스런 일이니까.

그러나 마치, 유년 시절에 어둑어둑한 방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울다 잠드는 일을 반복하며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은연 중 영향을 받는 것마냥,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으면, 벤치에 앉아 해가 저무는 모습을 보며 낙담을 하던, 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오지 않을 거란 예전의 절망감이 떠올라 중얼거리곤 한다. "사실 난 기다리는 걸 싫어해요" ......그건 일종의 포비아다. 주위가 까맣게 변하는.

그러면서 난 누군가 나에게 기대 따위는 하지 말아 줄 것을 기대하며, 작은 일일수록 당연히 이뤄질 거란 식의 큰 기대를 할 것이고, 그만큼 실망을 크게 할테며, 그래도 난 여우와 같은 일방적인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저건 혼자 북 치고 장구 쳐서 기대하고 실망하게 되는 과정이라구, 하는 노력은 하고 있을텐데, 정작 나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며 실망시키고 화를 돋우며 살겠지.

(어젯밤에 윤성희씨의 단편소설 '서른 세 개의 단추가 달린 코트'를 다시 읽다가 옛 기억들이 떠올라 횡설수설거렸음; 아래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 대목임.)



    "그애가, 연락을 끊었어요. 전화번호도 바꿨더라구요."

남자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중략)

"은오는 말이죠, 이 커피숍에서 나를 기다렸어요. 내가 항상 한두 시간 약속시간을 지나쳤는데도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어요."
"어쩌면, 그 기다림에 지친 건지도 몰라요."

남자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하지만... 남자는 내 말에 무슨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하지만 다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잔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자, 원두 찌꺼기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 그 때도 이렇게 원두 찌꺼기가 많았던 커피를 마셨다. 전화를 할 때마다 오 분만 더, 라고 말하던 그를 나는 한 시간 삼십 분째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추운 날이었고, 창문마다 뿌연 성에가 끼어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다 내가 앉은 쪽 창문에만 성에가 녹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자꾸만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대로 그 가게를 나와서는, 다시는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순간 삼 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온몸이 피곤해졌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잠만 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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