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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왁스 2004/06/28
어제 머리를 잘랐다. 커트에 가까운 짧은 머리는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이후로 처음 해 본 건데, 그건 머리를 자르고 학교에 간 날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아이가 날 보자마자 "남자다!" 라고 외쳐 날 절망에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재수할 때 머리가 가장 길었고(허리까진 오지 않아도 등의 한복판을 가로질렀으니), 그리고 대학 1학년 때까지도 꽤나 긴 머리였던 나는 어느 날 단발 머리로 싹둑 잘라버렸는데(엄정화 때문이었다고 말하려니 쪽팔린다), 그 이후론 아무리 길어도 어깨를 살짝 넘는 길이였지 그 이상 기른 적은 없다.

그러다 어제 갑자기 머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들어서 미용실에 가게 되었는데, 미용사 언니가 "평소에 드라이 하세요?" 라고 묻는 거다. 별 생각 없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깜박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바가지를 쓴 듯한 충격적인 내가 거울에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미용사의 말은 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드라이 한다고 하면 단정하게 다듬었을텐데, 평소에 안 한다고 해서 일부러 끝을 지저분하게 다듬었어요. 머리 감고 왁스로 손질하시면 돼요."

헉... 왁스라니. 전부터 가져온 의문이지만, 왜 미용사들은 전국민이 왁스를 사용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왁스로 머리를 만질 줄 모른다. 왁스는 사용법이 어렵단 말이다! 게다가 머리에 이물질을 바르는 걸 안 좋아하는데, 그건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향이 나는 이물질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제발 '나 머리에 뭐 발랐어요' 라고 외치는 듯한 이물질은 이제 그만! 차라리 초콜릿이나 쑥냄새가 나는 무언가가 있으면 그걸 사서 바르겠다). 더욱이 그런 걸 바르면 어쩐지 머리를 평소보다 신경써서 박박 감아야 없어질 것 같고, 그러지 않으면 가뜩이나 머리숱이 적은 내가 탈모의 두려움에 덜덜 떨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처럼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돈을 내고 미용실을 나와버렸고, 회사로 오는 길에 왁스를 한 통 샀다. 예전에도 다른 미용실에서 "이 머리는 왁스를 발라야 해요" 라고 해서 한 통을 산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제대로 쓰질 못해 놓아두다가 결국 우리 회사 분에게 드린 바 있기에, 이번에 왁스를 새로 사면서도 또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돈 아깝단 생각에 괴로웠지만 어쩔 것인가.

회사로 왔더니 직원분들의 반응은 '삼순이다!'(잊지 않겠다) 1표, '사감 선생님 같네요' 1표, '미영씨 보니까 나도 자르고 싶네요' 1표, '왜 그랬어?' 3표, '인생 뭐 있냐'(젠장) 1표, '상큼해요' 1표, 그리고 최다 득표한 '이발했구나' 등이었다. (중복응답이긴 하지만, 그러고보니 일요일인데 사람 참 많이 나왔다)

왁스를 어떻게 쓰지? 손에 발라서 머리를 잡고 쥐어짜듯이 만지면 된댔어. 근데 예전에도 그렇게 해봤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잖아. 게다가 왁스는 잘못 바르면 떡이 지는 걸. 전에도 후배가 나한테 머리 안 감았냐고 물어봤었지. 내가 왁스를 바른 거라고 말하자 어떻게 그렇게 발랐냐며 어이없어 했잖아. 다른 사람들은 대체 왁스를 어떻게 발라서 멋지게 나오는 거지? 미용사가 만져준 머리도 삼순이란 소릴 들었는데 내일 아침 내가 만질 머리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리를 왜 잘랐지? 이 머린 묶지도 못하잖아!

......라며 괴로워하던 밤을 지나 아침. 좀전에 머리를 감고 대충 말린 다음 잔뜩 긴장한 채 왁스를 머리게 발라 쥐어짜듯 만져주었다. 역시나 미용실에서 만져주는 것처럼 신기한 볼륨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끝이 사방으로 뻗쳤을 뿐이다. 거울 속엔 바가지를 덮고 머리를 다듬은 늙은 아톰이 서 있다. 우하하하! 정말 색다른 경험인걸!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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