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스크린'에 해당되는 글 1건

  1. 일과 2003/11/21
우울하고 지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마음이 그래서 몸이 아픈 건지, 몸이 아파 마음이 그런 건진 헷갈리지만... 분명한 건 일주일 간 누워만 있어도 답답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피곤하다는 거다.

토요일에 전공 과목 보강이 있는데, 그 때까지 무엇 무엇을 해가지 않으면 후환이 무서울 것이란 교수님의 엄포에 오늘 저녁 나는 실기실에서 과제를 했다. 두려움은 피곤보다 강했다.

과제란 건 실크 스크린을 해 가는 거다, 문양이 새겨진('감광 떴다' 고 한다) 틀을 천 위에 놓고, 염료와 기타 재료를 섞은 것으로 찍어내는 작업인데, 한 번만 달랑 찍기 보다는 대개 위아래 옆으로 나란히 찍어 반복되는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어서 찍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염료를 미는 힘이 판마다 달라서 여기는 흐리게 저기는 진하게... 그런 식으로 바둑판 무늬처럼 찍어 버렸다. 침울한 마음으로 작업을 하던 나는 더욱 침울한 심정으로 내 앞의 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웃음이 터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 천이 아주 힘차고 우렁차게 외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똑똑히 보아라!! 이것이 repeat 이다!!!"

느닷없이 낄낄거리자 옆에서 작업하던 후배가 왜 그러냔다. 그래서 저 말을 외쳐주었다. 그녀와 내 천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다. 그 시간 후로도 작업하면서 계속 천이 이런 저런 말을 외쳐대는 것 같아 계속 웃었다. "진정한 repeat을 보여주마!!", "흐른 염료는 닦으면서 해라 바보야!" 등등... 아무리 우울한 상황이라도 쓰잘데기 없는 상상으로 웃어대는 내가 솔직히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그러다 하나 둘 가버리고 혼자 남을 때까지도 나는 결국 과제를 완성하지 못 했는데, 내일이든 모레든 보강 전에 하자고 생각하고 학교를 나와 버렸다. 결국 피곤은 두려움보다 강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냥 서둘러 자 버릴 마음을 먹고 있다. 될대로 되라지. 어떤 무엇도 피곤한 사람은 이길 수 없다. 최강이다. 아싸.




(덧붙임)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잠을 자다가 술취한 사람의 우렁찬 전화 통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집 앞이 얼마 안 남았다. 편의점에 들렀다 갈까 하는 생각에 지갑을 열어 만원짜릴 꺼내는데, 그만 손에서 돈이 흘러나갔다. 하필 나는 오늘 내리는 문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만원은 하늘하늘 몸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 문 바로 앞에 떨어져 버렸다. 가방도 자리에 놓고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가니 버스의 속도가 늦춰지는 것 같다. 기사아저씨가 힐끔 바라보며 문을 열어주실 태세다. 정거장이었던 거다. 좁아터진 계단에 앉다시피하며 돈을 주우려는 찰나였는데, 문이 열리면 만원은 그대로 바람에 실려 멀리 날아가 버릴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왼손을 흔들며 "내리는 거 아니예요" 라고 외쳐야 했다. 버스는 다시 속력을 냈고, 나는 내 자리로 돌아온 뒤에 다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_-




2003/11/21 01:15 2003/11/21 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