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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래 도시 2002/01/05
어젯밤은 조금 늦게 퇴근을 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집으로 들어가는데,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은 컴컴한 길을 걷던 중에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방송 뉴스. 복제양 돌리의 관절염이 어떻고 세포 조직이 어떻고 하는 것 같다. 남자 아나운서의 덤덤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뉴스를 들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동네는 전형적인 서민 동네다. 자아 계발을 위해 직업을 갖는 게 아니라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워 일하러 나가는 부모들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거를 시작해 대학 대신 월셋방 구석으로 부둥키고 들어가는 청춘들과, 대여섯 명이 교회 마당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낄낄거리는 것으로 이성교제를 하는 중고생들과, 어디서 배웠는지 거친 욕설을 거리낌없이 내뱉으며 싸우는 초등학생들과, 아무도 없는 집이 답답한지 종일 동네 골목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는 노인들이 사는 곳이다. 가끔 어느 밤이면, 술에 취한 사람들이 이년 돈 갚아라, 내가 너를 남편이라고 믿고 살다니, 차라리 날 죽여라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빈 골목에 울려퍼진다.

아주 작은 동네다. 행정상 구역 자체가 넓지 않다.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드물어서 누군가 '어디 살아요?' 하고 물으면 우리 동네 이름을 말하는 것보다 바로 옆 동네의 이름을 대면서 '그 근처예요' 하고 답하는 게 이해가 훨씬 빠르다. 그런 작은 공간 속에서도 나름대로 그 안에 빈부가 있고 식자와 비식자가 있고 여러 갈래로 계급은 갈려져 있다. 자기 점포가 있어 안정적인 수입이 있거나 매달 들어오는 월셋돈이 있는 집은 알부자로 소문이 나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매일 읽으며 KBS 뉴스를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사람은 인텔리로 간주된다.

신년 초,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아 컴컴한 자정 무렵, 뉴스가 흘러나온 곳은 그 시각에 빵을 사러 나올 사람이 행여나 있을까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문을 열어놓은 어느 빵집이었다. 을씨년스런 골목길은 아무리 바라봐도 복제양 돌리의 관절염 소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21세기 찬란한 과학 문명에의 기대는커녕 정초 분위기도 제대로 나지 않는 곳이다.

6·25를 소재로 만든 영화에 깔린 동요 OST 마냥 생뚱하기 그지없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멍한 기분으로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던 빵집의 간판은 다시 보니 설상가상 '아데네 제과점'이다. 아데네란 단어를 아테네로 잘못 읽곤 씁쓸한 웃음이 나왔었지...



재작년, 우리 동네 앞에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면서 있던 일이다. 출구가 네 개 있는 이 역은 무슨 까닭인진 몰라도 우리집으로 향하는 출구만 지상까지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어 있다. 그 동안 다른 역을 이용하느라 마을 버스를 갈아타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던 나는, 집에서 3분 거리인 역이 개통된 것도 반가운데 지상까지 연결된 에스컬레이터까지 생겼다는 게 좋아서 실실 웃었더랬다.

생각해보니 나의 출근길은 집에서 역까지의 짧은 거리를 걷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철을 타면 가만히 앉아있어도 회사 앞까지 옮겨지고 거기서 1분만 걸으면 회사였다. 물론 30분의 소요 시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나는 거의 꽁으로 공간 이동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 출퇴근 때마다 실없이 감탄을 해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퇴근길에 또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문득 어렸을 적 보았던 SF영화들이 떠올랐다. 제목은 일일이 기억나지 않아도 무수히 보았던 그 영화들에선, 앞으로 펼쳐질 미래 도시의 밤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곤 했다. 높이 솟아있는 빌딩들과, 밤인데도 빌딩 가득 켜져있는 불빛과, 건물 옥상마다 세워진 전광판과, 전광판마다 흘러나오는 기업 로고와, 빌딩 사이를 끊임없이 달리는 자동차 불빛과.

순간 지금 내가 살고있는 서울 거리가 그런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청 앞을 명동 거리를 테헤란로를 걸어가며 바라보던 풍경이 결국 그것 아니었는가. 뭐야, 어렸을 적 졸음을 참아가며, 이불 밖으로 졸린 눈을 내밀고 몽롱한 듯 바라보던 텔레비전 특선 영화. 거기서 그렇게 떠벌여댄 희망찬 미래 도시는 결국 이런 모습이잖아.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미래의 모습은 결국 이런 거였단 말이지. 날아다니는 자동차만 아직 없다 뿐이지 나는 지금 5분도 안 걷고 출퇴근을 할 수 있잖아. 그냥 가만히 서있거나 앉은 상태로 말이지. 고작 이거야? 그럼 앞으로 벌어질 거라 기대하는 모습들이란 어떤 거지? 5분도 걷지 않고 출근하는 복제 인간들인가?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허탈해하며 터벅터벅 걸어 우리 동네로 접어들었다. 테헤란로에 불빛이 가득하든 말든, 새로 나온 노트북을 사라는 전광판이 깜박이든 말든, 하루 하루 살아내는 것이 다행인 편모 가구가 모여 사는 모자원 건물 앞을 지나.



2002/01/05 14:32 2002/01/05 1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