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사 시험'이란 걸 봤다. 이력서를 넣고 며칠 뒤 저녁에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당장 내일 아침에 시험을 보러 오라고. 담당자는 '영어사전과, 본인의 전공사전을 지참하라'는 말을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엉겁결에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전공사전'이라니. 내 전공은 섬유공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제 경우엔 어떤 사전을 가져가야 하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만 내 멋대로 짐작을 하고 말았다. 그곳이 사전과 밀접히 관련된 출판사였기 때문에- 아마도 전공 관련 서적, 특히 사전을 평소에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 지 살펴보려는 것이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가진 전공 관련 서적이라곤 학교 수업 교재였던 '서양미술사' 같은 책이 전부였던 마당에 사전까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시계를 보니 교보문고 폐점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나는 부리나케 외투를 걸치고 택시를 잡아타서 교보문고 폐점 직전에 간신히 사전 하나를 샀다. 공예 관련 사전이 변변한 게 없었기 때문에 '현대미술사전'이란 걸 거금 이만오천원이나 주고서. 그리고 평소에 사전을 아주 가까이 했던 것처럼 보이려고 폈다 접었다를 여러 번 하여 길을 들였고, 밑면엔 매직으로 커다랗게 이름까지 써놓았다.
다음 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면서야 어떻게 된 영문인 지 알 수 있었다. 사전 없이 치르는 한자 독음과 한글→한자 변환 시험이 하나 있었고, 사전을 참고할 수 있는 외국어 번역 시험이 하나 더 있었던 것. 출판사인 그곳에 지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국문, 영문, 일문 등을 전공한 사람들이었고, 일어 전공인 사람은 일어사전을 참고하여 일본어 번역 시험을, 영문학 전공인 사람은 영어사전을 참고하여 영어 번역 시험을 보게 된 것이었다. 생뚱한 전공자인 나는 영어 시험지를 받아들었으니- 나 같은 인간은 그냥 영어사전만 들고 가면 됐던 것이다. 현대미술사전 같은 게 아니라.
폈다 접었다 수십 번에 떡하니 이름까지 써놓은 바람에 그 사전은 환불도 못 했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시험에 붙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두 달 다니고선 그만 둬 버렸다. 이틀 연속, 퇴근 시각 후 사장이 전 직원을 세워놓고(그 중엔 사장보다 나이 지긋한 선생들도 있었다) 한 시간 반 동안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대통령이었는 지 설교한 며칠 뒤였다. 물론 그밖에도 다른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그게 그곳을 나온 결정적 계기였다.
2.
지난 주 어느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데 함께 일할 수 있는지- 면접을 보러 오란 내용이었다. 오랫동안의 회사 생활에 지치기도 했고 또 현재의 프리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나는 이 생활을 포기하고 당장 다시 회사원이 되고싶은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지만 일단 면접을 보기로 했다. 혹시 또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나에게 꼭 맞는 일자리라면 입사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굳이 입사까지 하지 않는대도 이야기가 잘 되면 원고만 제공한다거나 단기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을테니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면접 날 마주앉은 사장이 설명해준 내가 할 일이란 건 내겐 그닥 매력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 사장이 계획하고 있는 앞으로 벌일 사업이라는 게, 공교롭게도 이전에 내가 다녔던 회사 두 곳에서-그것도 오래 전에-야심차게 시도하려다 망한 사업들과 같은 맥락의 아이템이었다. 사장은 그게 전혀 새로운 아이템인 듯 설명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얘길 들으면서 속으로 '사람의 상상력이란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서로들 크게 다르지 않나보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곳에서 내게 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사실 그 일들을 하라고 하면 그냥저냥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아있네- 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손가락 빨 상황도 아닌데 단지 안정적인 수입이 그리워서 흥미도 없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면 금세 회의를 느끼고 매일 출근길이 괴로울 게 뻔했다.
전에 내가 인사를 담당할 때 가장 짜증스러웠던 건 면접을 보고 다닐 것 처럼 대답했다가 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출근 날짜까지 잡아놓고 당일에 나타나지 않아 전화를 하면 그제서야 '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구인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던 쪽에선 정말 낭패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지금 말하신 일을 맡는다면 무리없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해온 일들과는 분야가 다르기도 하고, 앞으로 제가 꾸준히 흥미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보이네요. 이게 저의 솔직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장은 내가 일자리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가 늘어놓은 회사의 사업 계획과 비전이 무시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그 사업의 정당성과 비전에 대해 더욱 열올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요즘 젊은 것들은' 이라 에둘러서 그런 의미있는 사업에 단지 재미 운운하며 동참하지 않는 썩어빠진 정신상태의 나를 욕했다. 백수 주제에 집값이 올랐다며 희희낙락하는 전날 만난 후배를 욕했고, 빚지면서 사업한다고 비웃는 측근들을 욕했고, 한나라당을 욕했고, 강남 졸부들을 욕했고, 구청을 욕했다. 안중근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모두가 비웃을, 당장 오 년 안에 망할 것이 분명한 대한민국이라 펄펄 뛰는 그 앞에서 고등어같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나는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이례적으로 가방을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그만 일어서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그는 세상이 자기의 위대한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분노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 기집애 하나마저 자기를 알아봐 주지 않으니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 다른 이들에게 내 욕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곳을 나서면서 그의 밑에서 일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스러워 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 그곳에 가기 위해 쓴 시간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져서 휴대폰 헥사 게임 레벨이라도 깨뜨리려고 맹렬히 플레이했지만 실패. 열받아서 집앞 둘둘치킨에서 양념통닭이나 한 마리 사와 엄마랑 함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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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가방을 내쪽으로 끌어당기며..."에서 조낸 놀랐슴다.
대체님을 그 상황까지 몰고가는 사람이 있군요!!!
사실 술자리에서 등등 많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어요. 유별난 내용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제가 그런 얘길 들으러 간 자리는 아니었다는 것이죠. -.-
'사람의 상상력이란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서로들 크게 다르지 않나보군' ... 이 말씀이 정답이네요 ^.^
흐흐 네 그렇더라구요
고등어같은 표정 보고 싶어요
최대한 눈의 힘을 풀고 마음속으로 구구단을 읊조려 보세요 ^^;;
결과적으로 정말 잘하진 것 같아요.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기.
조금 난감한 상황을 경험하셨을지라도.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흐흐
답답하네요. 저도 2006 한해만 직장을 4번이나 옮기는 기염을 토하며! 살고 있습니다. ㅋㅋ 그중 얼뜨기같은 사장놈한테 성추행도 당했어요! -_-+ 미친놈. 지금 생각해도 얼뜨기 같아요. 지금은 나름 프리랜서 + 만족스러운 직장(?) part time에 몸담고 있고, 거기서 설 선물을 받아와서 부모님을 가져다드리며 희희낙낙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설 연휴에는 출근 안한다는 생각에 신나요.
뭐, 짤리고 나가고 그만두고 할 때는 힘들었는데 지나고보니 다 경험이더군요. 차마 좋은 추억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언니도 2006년 잘 마무리하시고 real 2007을 즐겨보아요.
4번 이직이라니 정말 격변의 해였네요. 성추행이라니 그런 쌍쌍바같은 후레자식...
그래도 이제 만족스러운 생활 하고계시니 참 좋아요.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면 더욱 더 ^^
응원 감사합니다. 우리 잘 살아보죠. 쌍쌍바 사장에겐 악성 치질의 저주를! (쌍쌍바 참 좋아하는데 이렇게 욕하니 쌍쌍바에게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