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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방 정리 2003/01/26
어젯밤, 무슨 생각으로 자정이 넘은 시각에 방 정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정확한 동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굳이 되짚자면 사상초유라는 인터넷 대란으로 습관적인 웹서핑을 할 수 없게 되자 심심했던 탓도 있고 (내가 방청소를 시작하자 엄마는 "역시 인터넷이 버려놨던 게지" 라며 혀를 차시는 한편 매우 기뻐하셨다. 엄마는 나의 정리 안 된 방을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년필 하나를 찾고 싶기도 했다.

다른 것에 비해 펜과 노트(정확히 말하자면 '종이')에 욕심이 있는 편인 나는 문구 센터에서 몸통이 스틸로 된 만년필을 본 순간부터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기만 한 아저씨풍의 다른 것들 사이에 드러누운 단순한 모습이 예뻐보였다. 그래서 몇 만 원의 돈을 흔쾌히 지불하여 그 녀석을 사 왔고, 오래도록 지니고 다니겠다며 필기를 할 때마다 흡족해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 두느라 짐을 옮기고 법석을 떠는 통에 나는 그만 그 녀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그 녀석을 굳이 찾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잃은 것'이 아니라 내 방 어느 구석엔 있을 것이란 이유로 만년필 찾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던 면이 크다.

그런데 어젯밤 나는 그 만년필이 매우 그리워졌고, 그 참에 책상 위부터 시작해 방 안을 뒤집는 대대적인 정리를 하게 되었던 게다.

처음엔 분류 기준을 정해 담아둔 것이 분명하지만 어느 새 기준 따위는 없는 듯 되어버린 서랍들과 바구니. 먼저 여러 개의 바구니(대개 선물받은 것들인 양철, 대나무, 원목, 플라스틱 등등 다양한 바구니에 이것저것 담아놓는다)를 모두 쏟았다. 나온 물건들을 하나 하나 먼지를 닦고 새로운 기준을 정해 나눠 담았다.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많은 컷터칼과 딱풀이 있는 줄 몰랐는데, 컷터칼이 예닐곱 개 나왔고 딱풀 역시 그만큼 나왔던 것이다. 매번 없어졌다며 새로 산 모양이다. 풀이야 두고 두고 쓸 수 있다손 쳐도(물론 너무 오래 되어 말라 비틀어진 고농축 풀을 하나 발견한 탓에 완벽한 안심은 되지 않지만), 이 많은 칼을 어디에 쓰나 한숨을 쉬던 나는, 이내 내가 또 다른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예를 들면 수십 개에 달하는 머리끈이랄지 핀 따위 말이다. 난생 처음 '곱창끈'이란 것을 내 돈 주고 샀다란 기억이 있는 것부터 최근의 것까지, 십 년 넘게 하나씩 하나씩 산 것들인데, 그것들의 상당수는 이제 보푸라기가 너무 많이 생겼거나, 고무줄이 늘어났거나, 구제불능으로 먼지가 끼었거나, 도금이 벗겨지고 장식이 망가지고 큐빅이 빠지거나 하여 볼썽사납게 된 것들이다. (그 중엔 불과 일 년 전에 하고 다닌 것들도 있는데, 이렇게 촌스러운 것들을 잘도 달고 다녔다니 그 때의 나란 참으로 난감했겠군,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태반이었다.)

방 안 여기저기 처박혀 있는 물건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심지어 '언젠가 이것을 소재로 한 조형물을 만들어야지' 란 생각에 하나 둘씩 모아둔 화장품 샘플병은 수백 개에 달했다.

이미 쓸모 없어진 것들을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부여잡고 있었구나, 란 생각이 들자 이제 그것들을 과감히 버릴 때가 되지 않았나란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쓰레기 봉투 쪽으로 되도록 많은 것을 던지려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대부분의 물건들을 또다시 챙겨두고 말았다. 낡고 헤어진 것들이라도 선뜻 버릴 용기가 아직 없었다. 나는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흔적이기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청소를 겸한 정리는 새벽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처음에 찾고 싶었던 만년필은 찾지 못 했다. 녀석은 예상보다 구석진 곳에 떨어졌나보다. 어쩌면 만년필은 내 방에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다른 곳에서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내 곁에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존재가 하나 있는데, 그래서 안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곤 허겁지겁 찾으니 그는 어디에도 없더라...... 라는 신파적인 생각을 하며 우울해했다.

만년필을 찾지 못했지만 역시 잃어버렸던 가느다란 0.1mm 펜은 발견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에 비해 다시 써보는 그 펜은 예전의 기억만큼 필기감이 훌륭하진 않았다.

며칠 동안 계속 방 정리를 하려 한다. 설사 하나 하나 먼지를 닦고 고스란히 넣어두는 일이 반복되더라도(아마 그럴 것이다), 나에겐 이 작업이 어쩐지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갖고있는 것들을 꺼내 확인하는 일, 그런 작업을 해본지 무척 오래 되었다......




2003/01/26 17:41 2003/01/26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