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월간 논 원고 마감일. 온종일 미친듯이 작업하고 원고를 넘기니 저녁 7시. 그제서야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 발견. 며칠 전 구입해서 한 번도 신지 않은 채 '냄새 좀 빠지라고' 집게 옷걸이에 걸어 창밖에 널어놓은 롱부츠가 떠오름. 골고루 충분하게 젖어서 절인 배추처럼 늘어진 부츠를 손에 들고 낙담.
갑자기 생긴 '올드미스다이어리' 시사회 자리. 동대입구역인 우리집에서 브로드웨이 극장이 있는 신사역까진 겨우 다섯 정거장.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을 너무 딱 맞추어 출발. 지하철을 타고 휴대폰으로 헥사 게임을 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림.
"나 지금 안국역이야. 금방 도착할 거야."
안국역은 무슨... 이 열차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구만. 저 아저씨 뻥을 쳐도 괴상하게 치네... 하고 피식 웃다가 밖을 내다보니 정말 안국역. 내가 반대 방향 열차를 탄 것이었음. 부랴부랴 하차, 반대편 지하철을 기다려서 탑승. 먼저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지는 '지하철을 반대로 탄 걸 모르고 있었다'는 내 전화를 받고 애인인 곤오빠에게 얘기했지만, 곤오빠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니? 못 믿겠다'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브로드웨이 극장에 도착. 명단에 없다는 시사회 담당자와 잠깐의 실랑이(?) 끝에 극장으로 진입. 영화는 이제 막 시작된 상황. 허리를 굽혀 좌석을 찾아 앉고 있는데 스크린에서 예지원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대뜸 들려서 화들짝 놀람.
"삼십대 백수 노처녀...!!"
헐.
영화를 아주 잘 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귀가. 모처럼 만난 서지와 좀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먼 서지의 귀가시각이 임박하여 각자 집으로 향함.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귀가했는데, 문어발 전 남자친구와의 작업물이 모처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옴. 급 우울 모드.
토요일-
전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울 모드를 퇴치하는 덴 대청소가 약이라고 판단, 방청소 시작. 바닥이며 책상, 책장, 창틀까지 구석구석 꼼꼼히 닦음. 앞으로 공연히 전 남자친구를 문득 떠올리는 일이 없도록, 그 동안 받은 선물들을 모조리 버림. 언젠가 그가 분홍색 구슬반지를 문구점에서 사와 끼워준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끼워보고 빼던 중에 줄이 끊어져 사방으로 구슬이 튐. 싹싹 쓸어모아 마저 버림.
저녁, 엄마와 함께 외출을 했다가 해토 망년회에 뒤늦게 합류하러 신촌으로 가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 가뜩이나 꿀꿀한데 눈까지 징그럽게 내리니 암담. 신촌 한복판에서 언성 높이고 따귀를 때려가며 싸우는 어린 커플 목격. 이런 큰 눈을 맞으며 저렇게 심하게 싸운다면 평생 잊지 못하겠구나 싶음. "낭만적인 기억은 금물이에요" 하며 다가가 우산을 씌워줄까 하다가 돌아섬.
2차가 끝나고 남은 멤버는 나, 동기 니꼴라스, 후배 양아, 묵이, 상태. 양아가 잘 안다는 마포의 어느 횟집에 가려 했지만, 평소 주말에도 자정 넘어 택시 잡는 게 하늘의 별따기인 신촌은, 눈 폭격을 맞은 이날은 택시와 승객의 전투로 온통 아우성. 결국 신촌 횟집으로 들어가 3차 시작.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송이를 보며 우울한 기분이 자꾸 들었으나 대화만큼은 즐거웠음.
그간의 연애 패턴은 영 아니라는 충고를 들음. 그리고 앞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초반에 이애들에게 보여주고 검증 받겠다고 약속. '남자 보는 눈은 남자가 정확하다'고. 하지만 그동안의 문제들은 주위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 그래도 나는 그이를 훨씬 많이 지켜봤다고. 너희는 단지 몇 시간만 보고 판단했을 뿐이잖니?' 라는 마음가짐 때문이란 걸, 이애들도 나도 알고 있음.
날이 밝음. 지하철 운행 시각까지 기다렸지만 춥고 취한 김에 택시에 승차, 집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감. 택시에서 내려 집까지 백여 미터를 걸어가야 하는데, 가뜩이나 취한 상태에 폭설을 예상 못하고 신고 나온 9cm 하이힐을 신고 경사진 눈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음. 결국 구두를 벗고 스타킹 바람으로 걷기 시작.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더운물을 들이부었음. 아이들과 낄낄거리며 얘기하다 돌아온 참이지만, 방에 들어오니 문득 속상해져서 펑펑 울기 시작. 끝난 연애로 우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짐.
일요일-
홍대 앞에서 후배를 만남. 가는 길에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보며 '저런 눈길을 구두를 벗고 걷다니' 하며 몸서리. 취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일.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이제 어딜 갈까 궁리. 이런저런 이유로 몇 곳을 패스시키고, 나의 권유로 후배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으로 향함. 그러나 이날따라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사람이 많아서 어정쩡한 자리에 티테이블을 놓고 앉아야 했음. 도무지 대화를 할 수 없게 만든 요인 중 하나는 근처 테이블 일행이던 한 아가씨. 방심할 틈을 주지 않고 들려온 그녀의 "꺅꺅꺅꺅!" 하는 요란한 웃음소리 때문에 도 나도 급 좌절.
얼마 후.
"됐어. 이제 저 아가씨 그 정도로 크게 웃진 않을 거야."
"언니가 어떻게 알아?"
"봐 봐. 남자 일행 대부분이 일어나잖아. 남자들 중에, 저 아가씨가 마음에 둔 남자가 있을 거야. 그래서 평소보다 오버했던 거지. 이렇게 생각했을 걸. '내 솔직하고 내숭없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하지만 이제 다들 일어나니까, 이제부턴 그러지 않을 거야."
"꺅꺅꺅꺅꺅!"
"언니 뭐야. 그대로잖아."
"남자 한 명은 남았잖아. (자신 없이)저 남자를 좋아하나 보지."
결국 음악을 듣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분위기 속에서 맥주를 마시다 일찍 헤어짐. 후배는 나중에 문자메시지로 '우리가 만났던 날 중 가장 간소하고 조용했던 날'이란 평을 내림.
집에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엄마가 말씀하심.
"어제 네가 방 닦은 걸레 있지, 그거 내가 현관 앞 계단 청소할 때 쓰는 걸레야!"
서른이 며칠 안 남은 나의 주말.
월간 논 원고 마감일. 온종일 미친듯이 작업하고 원고를 넘기니 저녁 7시. 그제서야 밖에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 발견. 며칠 전 구입해서 한 번도 신지 않은 채 '냄새 좀 빠지라고' 집게 옷걸이에 걸어 창밖에 널어놓은 롱부츠가 떠오름. 골고루 충분하게 젖어서 절인 배추처럼 늘어진 부츠를 손에 들고 낙담.
갑자기 생긴 '올드미스다이어리' 시사회 자리. 동대입구역인 우리집에서 브로드웨이 극장이 있는 신사역까진 겨우 다섯 정거장. 여유를 부리다가 시간을 너무 딱 맞추어 출발. 지하철을 타고 휴대폰으로 헥사 게임을 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의 전화 통화 소리가 들림.
"나 지금 안국역이야. 금방 도착할 거야."
안국역은 무슨... 이 열차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구만. 저 아저씨 뻥을 쳐도 괴상하게 치네... 하고 피식 웃다가 밖을 내다보니 정말 안국역. 내가 반대 방향 열차를 탄 것이었음. 부랴부랴 하차, 반대편 지하철을 기다려서 탑승. 먼저 극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지는 '지하철을 반대로 탄 걸 모르고 있었다'는 내 전화를 받고 애인인 곤오빠에게 얘기했지만, 곤오빠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니? 못 믿겠다'며 시큰둥한 반응이었다고.
브로드웨이 극장에 도착. 명단에 없다는 시사회 담당자와 잠깐의 실랑이(?) 끝에 극장으로 진입. 영화는 이제 막 시작된 상황. 허리를 굽혀 좌석을 찾아 앉고 있는데 스크린에서 예지원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대뜸 들려서 화들짝 놀람.
"삼십대 백수 노처녀...!!"
헐.
영화를 아주 잘 보고 흡족한 마음으로 귀가. 모처럼 만난 서지와 좀더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먼 서지의 귀가시각이 임박하여 각자 집으로 향함.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귀가했는데, 문어발 전 남자친구와의 작업물이 모처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옴. 급 우울 모드.
토요일-
전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울 모드를 퇴치하는 덴 대청소가 약이라고 판단, 방청소 시작. 바닥이며 책상, 책장, 창틀까지 구석구석 꼼꼼히 닦음. 앞으로 공연히 전 남자친구를 문득 떠올리는 일이 없도록, 그 동안 받은 선물들을 모조리 버림. 언젠가 그가 분홍색 구슬반지를 문구점에서 사와 끼워준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끼워보고 빼던 중에 줄이 끊어져 사방으로 구슬이 튐. 싹싹 쓸어모아 마저 버림.
저녁, 엄마와 함께 외출을 했다가 해토 망년회에 뒤늦게 합류하러 신촌으로 가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 가뜩이나 꿀꿀한데 눈까지 징그럽게 내리니 암담. 신촌 한복판에서 언성 높이고 따귀를 때려가며 싸우는 어린 커플 목격. 이런 큰 눈을 맞으며 저렇게 심하게 싸운다면 평생 잊지 못하겠구나 싶음. "낭만적인 기억은 금물이에요" 하며 다가가 우산을 씌워줄까 하다가 돌아섬.
2차가 끝나고 남은 멤버는 나, 동기 니꼴라스, 후배 양아, 묵이, 상태. 양아가 잘 안다는 마포의 어느 횟집에 가려 했지만, 평소 주말에도 자정 넘어 택시 잡는 게 하늘의 별따기인 신촌은, 눈 폭격을 맞은 이날은 택시와 승객의 전투로 온통 아우성. 결국 신촌 횟집으로 들어가 3차 시작.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송이를 보며 우울한 기분이 자꾸 들었으나 대화만큼은 즐거웠음.
그간의 연애 패턴은 영 아니라는 충고를 들음. 그리고 앞으로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된다면 초반에 이애들에게 보여주고 검증 받겠다고 약속. '남자 보는 눈은 남자가 정확하다'고. 하지만 그동안의 문제들은 주위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 그래도 나는 그이를 훨씬 많이 지켜봤다고. 너희는 단지 몇 시간만 보고 판단했을 뿐이잖니?' 라는 마음가짐 때문이란 걸, 이애들도 나도 알고 있음.
날이 밝음. 지하철 운행 시각까지 기다렸지만 춥고 취한 김에 택시에 승차, 집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감. 택시에서 내려 집까지 백여 미터를 걸어가야 하는데, 가뜩이나 취한 상태에 폭설을 예상 못하고 신고 나온 9cm 하이힐을 신고 경사진 눈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음. 결국 구두를 벗고 스타킹 바람으로 걷기 시작.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 더운물을 들이부었음. 아이들과 낄낄거리며 얘기하다 돌아온 참이지만, 방에 들어오니 문득 속상해져서 펑펑 울기 시작. 끝난 연애로 우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짐.
일요일-
홍대 앞에서 후배를 만남. 가는 길에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보며 '저런 눈길을 구두를 벗고 걷다니' 하며 몸서리. 취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던 일.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이제 어딜 갈까 궁리. 이런저런 이유로 몇 곳을 패스시키고, 나의 권유로 후배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으로 향함. 그러나 이날따라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사람이 많아서 어정쩡한 자리에 티테이블을 놓고 앉아야 했음. 도무지 대화를 할 수 없게 만든 요인 중 하나는 근처 테이블 일행이던 한 아가씨. 방심할 틈을 주지 않고 들려온 그녀의 "꺅꺅꺅꺅!" 하는 요란한 웃음소리 때문에 도 나도 급 좌절.
얼마 후.
"됐어. 이제 저 아가씨 그 정도로 크게 웃진 않을 거야."
"언니가 어떻게 알아?"
"봐 봐. 남자 일행 대부분이 일어나잖아. 남자들 중에, 저 아가씨가 마음에 둔 남자가 있을 거야. 그래서 평소보다 오버했던 거지. 이렇게 생각했을 걸. '내 솔직하고 내숭없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하지만 이제 다들 일어나니까, 이제부턴 그러지 않을 거야."
"꺅꺅꺅꺅꺅!"
"언니 뭐야. 그대로잖아."
"남자 한 명은 남았잖아. (자신 없이)저 남자를 좋아하나 보지."
결국 음악을 듣는 것도, 대화를 하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분위기 속에서 맥주를 마시다 일찍 헤어짐. 후배는 나중에 문자메시지로 '우리가 만났던 날 중 가장 간소하고 조용했던 날'이란 평을 내림.
집에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있는데 엄마가 말씀하심.
"어제 네가 방 닦은 걸레 있지, 그거 내가 현관 앞 계단 청소할 때 쓰는 걸레야!"
서른이 며칠 안 남은 나의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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