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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추럴 컵 브레이커 (8) 2009/01/11

나는 컵을 진짜 많이 깨뜨렸다. 컵에 영혼이라도 있다면 나는 죽어서 분명 지옥행이다.

그쪽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일학년 때.
여선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 교실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가곤 했는데
나는 방과 후 청소시간에 그 컵들을 씻는 당번이었다.
창틀 먼지 닦는 당번, 복도 마루 닦는 당번 등 다른 종목이 많았는데 하필 컵 당번이 된 거였다.
청소시간이 되면 컵들을 쟁반에 담아 운동장 수돗가에서 씻는다. 그게 끝인데
어째 자꾸 컵이 깨졌다. 컵이 깨지면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고, 엄마는 새 컵을 사서 들려 보냈다.
몇 번이나 그 과정이 되풀이되자 엄마는 깨질 염려가 없는 플라스틱 컵 세트를 사주었는데
그걸 본 담임 선생은 기가 차다는 듯
"어떻게 선생님들이 쓰는 컵을 플라스틱으로 사올 수 있냐" 며 찌푸렸고
결국 엄마는 사기로 된 컵을 다시 사 보내서... 나는 그 컵을 또 깼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바에 왜 날 계속 시켜, 아니 그것보다 자기들 먹은 설거지를 왜 애한테 시켜... 싶지만
여하간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나는 컵을 잘 깨는구나.

아르바이트했던 까페에서는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컵이며 유리 재떨이를 하도 깨뜨려서
처음에 내가 컵을 깨뜨리면 깜짝 놀라 "괜찮냐"며 달려왔던 사장 아저씨는
나중엔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도 한 번 쓱 보고 말았당.
결국 그곳은 또 컵을 깨뜨리다가 손가락을 베어서, 두 바늘 꿰매며 마무리.

처음 다니기 시작한 회사에서는 직원들 컵 씻어주다가
하필 사장님이 애인과 찍은 사진을 박은 기념 컵을 깨뜨려서, 눈앞이 캄캄했던 적도 있고.
집에서 깬 건 너무 많아서...... 아아 주마등처럼 지나가는구나.

대부분 설거지하다가 깨뜨린 건데, 이색 경력을 추가할 뻔한 적은
친구 서지랑 남대문 그릇 상가에 갔을 때.
뚱뚱한 가방을 메고 주의까지 산만했던 내가 몸을 돌리면서
쌓여 있던 접시들을 가방으로 건드렸던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으나
서지가 접시들을 부여잡아 참극을 면했지. 으악.

갑자기 컵 이야기를 꺼낸 건
오늘도 설거지하다가 컵 하나를 깨뜨렸기 때문.
꼭 좋아하는 컵이 깨진다. 잘 가라, 오랜 시간 일하느라 고생했던 곰돌이 컵아.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당.



2009/01/11 23:53 2009/01/11 2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