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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 공부, 백범, 이름 2004/02/09
1.
 '네가 말을 할 때에는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아라비아 속담. 요즘 들어 말이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던 차에 이 속담을 보게 됐다. 뼈저리게 와닿은 이야기. 말은 물론이거니와 행동이나 표정 역시 마찬 가지일 거다. 그러니까 의사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될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은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이 못 돼"......

상대방이 이런 반응을 보였을 때 부연설명을 하는 것은 처음 꺼낸 말에 비해 효력이 떨어진다. 이미 맨 먼저 들은 말(또는 제스추어)을 머리에 담아놓은 상대방의 생각을 돌리는 것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설령 그가 나에게 특별한 호의를 갖고있다 해도 그의 뇌는 나에게, 생각만큼 친절하지 않다.



2.
공부를 열심히 하면 학자가 되고, 더 열심히 하면 운동가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얘길 한 사람은 우스개처럼 얘기했지만 무척 예리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만약 누군가 공부를 더 더 열심히 해서 이 거대한 세상을 알아버린다면...... 결국 자살하게 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을 했었다. 어쨌든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운동이든 무엇이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부는 쥐뿔만큼도 안 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앞뒤가 안 맞는단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세상은 알면 알수록 희망이 없는 곳이 아닌가 싶기만 하다. 언젠가는 문득 '이렇게 날이 갈수록 절망적인데, 알고보면 내가 있는 곳이 현세가 아니라 지옥인 것은 아닐까' 란 생각도 했었다......



3.
우리 집 근처에 백범기념관이 있다. 오래 전 내 동생이 초등학생일 때 그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초상이 그려진 티셔츠를 받아왔는데, 동생이 덩치가 큰 편이어서 그 옷이 내게도 잘 맞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제법 작아보이지 않을 정도 크기였기에 한 동안 나는 그 옷을 자주 입고 다녔다. 김구 선생에 대해서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딱히 존경하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그 옷을 입으면 뭔가 있어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그 옷을 입고 출근했었다. 그런데 사무실을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던 어느 직원분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어머 대체씨, 그 사람 서세원이예요?"

......그것은 그 후로 내가 그 옷을 입지 않은 큰 계기가 되었다 -_-;;



4.
움베르토 에코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메아리>라는 뜻의 이름 때문에 이런 식의 농담을 들으며 자랐다. “넌 언제나 대답하는 사람이로구나.” “네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지고 있어.”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 뻔한 농담만을 되풀이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한결같이 멍청할까 하는 생각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이다님의 홈페이지에서도 그녀는 말한다.

 《○왜 이름이 이다냐. 이다도시의 이다냐?
 ●이다도시 꺼내면서 질문 하는 사람들은, 전부 그게 웃길거라고 생각하고 질문한다. 난 골백번도 그 소리 더 들어서 하나도 안웃긴다. 아무튼 이다는 안이다(아니다)의 이다다. (진짜 별 뜻 없다)

 발견했다는 듯이 원스타네요~ (cf: 그녀의 본명은 '○한별') 난 초딩 때부터 원스타가 어쩌고 두별이가 어쩌고 들었기 때매 당연 하나도 안웃긴다. 동생은 두별이야? 라고 묻는 사람은 아갈통 100대를 날려주겠다! 재미없다고!》


두 글 모두 읽다가 웃겨서 혼이 날 정도였는데, 그러고보면 나도 뻔한 농담을 참 많이도 해왔다. 단적인 예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동기분에게 했던 농담인데, 그 분의 이름은 ○미리. 내딴엔 참신하겠지란 생각에 "미리 미리 미리뽕......" 이란 노래를 불러드렸더니, 그 분은 몹시 괴로워하시면서 "난 그 노래가 제일 싫어!" 라고 외치셨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그 노래를 얼마나 많이 들으셨을까 싶다. 그 분에게 이 노래는 재미는커녕 지긋지긋한 노래일 거란 생각에 다시는 부르지 말아야겠단 다짐을 했다.

그러나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다른 직원분들에게 불러드렸던 노래는 나름대로 참신했다고 본다. ○소라님에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를 불러드렸고, ○동규님에겐 "동규밖~ 과수원길~" 을 불러드렸는데, 이만하면 괜찮은 선곡이 아니었을까 -_-;;

하지만 참신하다고 다 좋은 농담이 아닌 법. 내 본명인 '장미영'으로 인해 들었던 가장 참신했으나 어이없던 말은 "짠미역"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땐가 들었던 이 말을 아직도 기억할 정도로 이 별명이 무척 싫었는데, 아마 저 위의 소라님이나 동규님도 내 어이없는 농담에 아직까지 치를 떨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에코는 위의 글에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나는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적용되는 두 가지 법칙이 있으니, 첫째는 우리의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가장 뻔한 생각이라는 것이고, 둘째 우리는 뻔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보다 앞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4/02/09 18:04 2004/02/09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