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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후 4시의 희망- 기형도 2004/09/05
  2.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2004/09/05
  3. 가는 비 온다 - 기형도 2003/12/01

 오후 4시의 희망

                                   기형도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2004/09/05 19:15 2004/09/05 19:15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004/09/05 19:12 2004/09/05 19:12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2003/12/01 05:06 2003/12/01 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