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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펜팔은 조숙했네 2006/12/04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대표 네 명 중 한 명으로 끼어 과학경시대회에 나갔다. 수학과 과학에 취미가 전혀 없는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건 내 주제로 나갈만한 대회가 아닌데' 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때는 담임선생님이 시키는대로 그냥 참가했다.

네 명의 우리학교 아이들은 타 학교로 등교, 뿔뿔이 떨어져 저마다 다른 실험을 하게 되었다. 나에겐 양파의 표피세포 관찰 실험이 주어졌고, 각기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 3명씩 조를 이루어 진행되었다. 일찍 자라놓았던 나는 6학년 때 우리 반에서 남자애들을 모두 합쳐도 나보다 키 큰 아이를 손에 꼽을만큼 큰 편이었는데도, 나와 같은 조가 된 나머지 두 여자애들은 나보다 더 크고 살집도 제법 있는 편이었다.

다른 조보다 조숙한 외모의 아이들로 구성된 우리 조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 으레 느끼게 되는 동질감 때문인지 쉽게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실험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알고있는 과정대로 작업을 진행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점들 뿐. 사실 우리는 양파의 표피세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전과와 문제집에서 보아온 데다가, 그리기도 쉬웠다. 납작하고 기다란 육각형을 벌집처럼 그리고 그 안에 점 하나씩만 찍어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상의 끝에 우리가 얻은 결과를 그대로 그리기로 결정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아이들이 육각형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 조는 제출용 보고서에 까만 점만 잔뜩 찍어놓았다. 사실 그 때 마음속에 무슨 '곧죽어도 실험 결과를 정직하게 그리겠어용!' 하는 정의가 가득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냥 별 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내심 '세상에 양파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세포를 가진 양파 하나쯤 없겠냐'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ㅎㅎ

그러나 그런 세포를 가진 양파는 세상에 없었다. 결국 대회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선 담임선생님께 무척 혼났다. 선생님은 경시대회에 참가한 네 명의 아이들을 세워놓고 '필기시험까진 우리학교가 일등이었는데 실기시험 후에 최하위다. 이게 너희들 중 누구 탓이냐'고 꾸짖으셨는데, 보나마나 나 때문이었기 때문에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어쨌든 애초에 어울리지 않던 과학경시대회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펜팔 친구뿐이었다. 조 멤버 중 한 아이와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던 거다. 외모만큼이나 문체와 필체까지 어른스럽던 그애는 나와 제법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초등학생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싶겠지만 그때는 또 그렇게 할 말이 많았다. 그애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 중 지금 기억나는 건-역시 내용마저 조숙해서- '같은 반 남자애들이 유치해 죽겠어. 왜들 그러는 걸까' 하는 이야기들. ^^ 그리고 우리 조였던 다른 한 명의 아이와는 어쩐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끼린 잘 맞는 것 같다며 '어른스러운 우리'에 대한 자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그애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기 시작했다. 감감무소식.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야 오랜만에 편지가 날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봉투를 열었더니 내용인즉슨-

 (↓실제로 이런 말투를 썼습니다요.)
 "오랜만이지? 그동안 편지 안 해서 미안해.
 사실은 저번에 네가 보냈던 편지를 보고 오해를 했지 뭐야!
 네가 장미가 그려진 편지지에 편지 쓴 적이 있잖아.
 괴상한 시(詩)만 잔뜩 적혀있길래 이상하게 생각했단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 편지를 다시 꺼내봤는데
 뒷면을 보니 너의 글씨가 가득 쓰여 있는 거야!
 내가 오해를 했구나 블라블라......"


그랬다. 그게 아마 작게 재단되어 편지지를 접을 필요 없이 봉투에 넣어도 되는 편지지였다. 내딴엔 편지를 쓴 다음에 장미가 그려진 편지지와 어울릴 거란 생각에 -_- '아름다운 장미여 어쩌고 저쩌고' 하는 장문의 시를 정성껏 써서 보냈는데- 그애는 그쪽 면만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곤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은 거였다. 아 맙소사.

그애의 오해는 풀렸다지만 그 후론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쓴 시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니. 게다가 얼마나 이상해보였으면 펜팔 관계마저 끊으려 했던 것이냐......싶어서. 차라리 모르면 좋았을 내막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펜팔 관계는 그렇게 끝났다. 조숙함에서 시작되어 조숙함으로 치닫다가 끝난 펜팔이었다. 그래봤자 특이한 표피세포를 가진 양파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 믿은 초등학생들이었지만 말이다. 자다 일어나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오른 건 무슨 일이래. 나가서 산책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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