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입 전부터 친가와 외가 양쪽에 문득 카톨릭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집 저 집 거의 모두 교인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도 별 동요가 없었는데, 뺑뺑이를 돌려 카톨릭 계열 고등학교에 배정받자 일 년 동안 교내에서 교리 수업을 받으면 영세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세가 무슨 자격증도 아닌데 그 때는 '받아놓으면 좋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차였고, 마침 또 친구가 함께 듣자고 얘기하길래 오케이 하게 된 거였다. 그리고 얼떨결에 종교부장이란 직책까지 맡게되어 열심히 활동을 했더랬다. 그러나 막상 학년 말 영세를 받는 즈음은 이미 종교에 대한 열의나 흥미를 잃은 후였다.
교리 수업을 받으며, 일개 고딩이긴 하지만 내가 갖고있는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천주교리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은 것도 이유였고 (결혼했던 여자는 결코 수녀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길 당연하다는 듯 하는 수녀님에게 그런 이유로 받아줄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사랑이고 포용이냐고 대꾸하거나, 여자만 머리에 써야하는 미사보랄지 굳이 영세를 받은 사람만 주의 살과 피라는 영성체를 받아먹을 수 있다는 점 등이 도무지 맘에 안 든다고 하는 둥), 또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때의 열의에 비해 쉽게 시들해져 버리는 성격도 한 몫 단단히 했을 터였다.
그러나 3 학년이 되었을 때부터 나는 시들해진 차원을 떠나 종교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수녀님도 싫었고 신부님도 싫었고 고해성사나 성당, 신자들의 행동 등 모든 게 맘에 안 들기 시작했다.
하기사 그 즈음은 종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하긴 한 때였다. 세상이 싫었고 어른이 싫었고 어른의 위선을 빼닮은 아이들이 싫었고 입시제도가 싫었고 학교가 싫었다. 아침, 학교에 가다 도무지 들어갈 마음이 안 나 교문 바로 앞에서 뒤로 돌아 다시 집으로 걸어간 적도 있었고, 아주 아픈 것도 아닌데 과장을 해서 일찍 조퇴를 하기도 했다. 미술학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나는 너무 큰 고민을 안고 있었고 지독한 염세주의에 빠져있었다. 내 괴로움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에 늘 힘들어했더랬다. 게다가 내 아픔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지 못 했다. 이 사람은 정말 믿을만하다 생각하여 고민을 털어놓아도 공부를 안 하니까 그런 잡생각이 드는 거라거나, 일단 대학에 가서 생각하고 그 전엔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충고도 해결책도 아닌, 그저 '너 정말 힘들겠구나' 란 토닥임이 필요했는데.
마지막이다란 마음으로 몇 달만에 성당을 찾아가 고해성사실에서 이야길 꺼내보기도 했다. 굳이 신부님께 직접 얘기하지 않고 성사실을 찾은 것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만큼 가깝게 지내는 신부님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직접 보며 얘기하는 것보단 낫지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신부님의 답은 보속으로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몇 번씩 외세요, 하는 것이었다. 보속이란 지은 죄의 대가를 용서받기 위해 치르는 대가이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 찾아왔는데 나더러 죄를 뉘우치라고? 정나미가 떨어져 성사실을 나왔다.
꿈을 꾸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종교를 싫어했던 건 다른 어느 이유보다도 이곳이 나를 구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구나. 갑자기 삐딱선을 타고든 고 3 시절, 다른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학교의 수녀님들마저 누구 한 명 다가와 '미영아 뭐가 그렇게 힘드니' 라 말을 거시지 않았다. 2 학년 내내 종교부장이네 성실한 예비신자네 하며 매일같이 만나 가깝게 지내던 그 분들은 나의 변화를 알고는 있되 다가오진 않으셨던 거다.
단 한 번, 수녀님 중 한 분이 나를 불렀다. 그 분 수업 시간에 다른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수녀님은 교무실 책상 앞에 앉아계시고 나는 그 앞에 서서, 수녀님이 "수업 태도가 왜 그러니" 하셨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녀님은 혹여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나의 불성실한 태도에 대한 이야길 꺼낸 것 뿐이었고 그 넓은 교무실은 다른 선생님들과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던 터. 그 상황에서 수녀님을 붙잡고 할 얘기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서서 '실은 하고싶은 얘기가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서 할 수는 없어요' 라 속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는데 수녀님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됐다, 가라."
또 한 번, 다른 수녀님이 내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 문득 내 얘기를 하셨다는 이야기도 건네 들었다. "머리 염색도 하고 눈썹도 다듬고 수업 태도도 그렇고. 걘 어떻게 되려고 그러니" 하셨댄다. 그 뿐이었다. 몇 달 전 내가 '성실한' 신자였을 때 반갑게 먼저 아는 척을 하던 수녀님들은 더 이상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만 보여주곤 했다.
간섭하지 말라며 집을 뛰쳐나가는 어린 친구들의 마음은 실은 누군가 간섭하길 바라고 있다. 아니다, 간섭이 아닌 관심, 을 바라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안아주길 바라는 아이들. 그러나 주위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고 그것을 참지 못 해 뛰쳐나간다. 후에 보면 정작 애초에 가지고 있던 고민이나 문제점보다도, 그로 인해 깨달은 외로움이 더 큰 고민거리로 되어 있기도 한다. 어쩌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도 돌아오는 건 '공부해야지' 식의 말이나 '아직 어린게' 류의 말이나 죄책감의 확인, 그런 것들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란 건 방황하는 내게 누군가 다가와 관심을 보이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어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는 거였다.
누군가 단 한 명, 나를 이해하는 듯 느껴지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어쩜 길었던 방황을 조금 일찍 접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그 한 명이 마침 수녀님 혹은 신부님이었다 해도 내가 그토록 시들함의 도를 넘어 종교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내가 학교와 주위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겉돌고 있는 때에도 성실한 학생 신자 아이들은 매주 성당을 나갔고 주님의 살과 피를 얻어 먹었고 수녀님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간 미사에선 그 동안 그렇게 오래 성당에 나오지 않던 아이가 고해성사도 안 하고 영성체를 받는다고 나가겠다니 그러면 안 된다고 제지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었다. 내 눈에 비친 종교는 종교적 행위에 '성실한' 신도들만 사랑하는 곳이었다.
종교라는 이름 아래 모인 사람들도 결국 어떤 공통된 목적으로 모인 단체일 뿐이고, 그러므로 자신들이 규정한 틀 밖으로 벗어난 사람까지 굳이 예쁘게 봐 줄 수는 없을 수 있다고 애써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고 말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랑은 무슨, 포용은 개뿔, 이해도 잘 못 하면서 용서는 무슨, 그렇게 냉소하곤 했다.
잠에서 깨어 고 3, 그 힘들었던 때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서러움이 밀려와 울고 말았다. 꿈에서 만난 그 수녀님은 아직 학교에 계실까.
증오감도 점점 시들해져서 이미 종교에 대해 별 생각도 안 하고 살던 재작년 겨울, 뗄 서류가 있어 학교 서무실에 갔을 때 그 분을 만났더랬다. 처음에 얼굴을 잘 못 알아보시던 수녀님은 내가 먼저 이름을 얘기하자 '아아, 그래' 하셨다.
그 때 나는 꿈에서처럼 얘기하고 싶었다. 저 고 3 때 대학에 떨어졌지만 재수해서 학교에 갔거든요. 수녀님 걱정하시던 것처럼 비뚤게 막 나가지 않았어요. 대학에 가서두 솔직히 과 공부는 잘 안 하지만요, 히히, 그래도 하고싶은 다른 일들 이것저것 했는데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있어요 수녀님, 그게 뭐냐면요...... 하고.
그러나 수녀님은 내가 누군지 확인하시고 서둘러 얼굴을 돌린 채 서무실을 나가셨다. 오늘 내가 꾼 꿈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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