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슬픈 걸 슬퍼하고
우울한 걸 우울해하고
괴로운 걸 괴로워하고
속상한 걸 속상해하고 ,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행복한 걸 행복해하고
기쁜 걸 기뻐하고
즐거운 걸 즐거워했다는 것.
어쩌면 딱 그만큼 겪을 수 있던 일들도
스스로 풍선 불듯 이만큼 부풀려 놓으니
거기에 눌리고 또 바람이 빠지면 그만큼 힘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함께 본 언니는 여주인공의 행동을 '전혀 예상 못한 일'이랬다.
슬픔과 분노로 괴로워하던 여자가 칼을 들고 남자를 찾아갔을 때
언니는 그녀가 남자를 찌를 거라 예상했지만, 여자는 그 칼로 자신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런 언니의 예상이 예상 밖이어서 놀랐다. 나는 그녀가 칼을 챙기는 순간부터 당연히 자해하려는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언니에게 놀라웠던 그 장면이 내겐 놀랍지 않았다.
영화를 떠올린 건, 점심 때 어느 아가씨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 아가씬 답답하거나 우울할 때 귀를 뚫으면 마음이 좀 나아졌다고 했다. 답답한 게 뻥 뚫리는 기분?
그렇게 하나씩 뚫은 게 일곱 개의 귀고리 자리.
그 마음을 안다. 나도 그랬다. 뭔가 답답하고, 뭔가 안 풀리고, 이제 어떡하지? 궁리해도 막막한 심정일 때 귀를 뚫었다. 귀고리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 같은 이유에서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다분히 피학적인 행위였고 그로 인해 만족했다. 고백하자면 대부분을 내가 직접 뚫었다. 여섯 개의 귀고리를 하자 이제 귀는 그만 뚫고 싶었다. 그래서 코를 뚫어봤고(아 이건 전문가에게 맡겼다), 문신도 생각해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헤나 정도로 만족했다. 이십대 중반까지 그랬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코에 뚫었던 구멍은 오래전에 막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귀고리 자국들도 개점휴업 상태. 가끔 특별한 날에만 양쪽에 하나씩 걸어보곤 한다. 문신은 여전히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들을 멈추었다.
멈추었다.
나는 이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지 않는다.
내 몸 어딘가에 들키지 않고 상처 낼 수 있는 곳을 찾지 않는다.
지칠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지금 나더러 귀를 직접 뚫으라고 하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다. 여하간
나는 멈추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떻게 멈추게 된 걸까.
그냥 멈춘 것은 아닐 것이다. 감정을 배출하는 다른 길을 찾은 것일 텐데 그게 뭐였을까. 생각하다가
낯간지럽지만 그게 글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혹은 지금의 나로선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대상일 수도 있겠는데. 그게 무엇이 됐든 잘된 일이란 생각을 하다보니
작년, 한창 힘들어하면서
전처럼 나를 망가뜨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다행이었다.
이제, 너를 찌를 수 없다고 나를 찌르지 않겠다.
그가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내가 괴로워하지 않겠다. 는 생각이 드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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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마와요. 이번엔 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지만 어쨌든 헤엄쳐서 나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