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최승자


     1

 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
 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
 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
 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
 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2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3

 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
 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
 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
 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
게 가르쳐 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
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
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
 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4

 자신이왜사는지도모르면서 육체는아침마다배고픈시계얼굴
을하고 꺼내줘어머니세상의어머니 안되면개복수술이라도해줘
말의창자속같은미로를 나는 걸어가고 너를 부르면푸른이끼들이
고요히떨어져내리며 너는이미떠났다고대답했다 좁고캄캄한길
을 나는 기차화통처럼달렸다 기차보다앞서가는 기적처럼달렸
다. 어떻게하면 너를 만날수있을까 어떻게달려야 항구가있는
바다가보일까 어디까지가야 푸른하늘베고누운 바다가 있을까
 

             (최승자 시집, <이 時代의 사랑>에서)





2010/06/22 01:06 2010/06/22 01:06


   흐린 날

               최승자



   자본도 월급도 못 되었던
   내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나도 아닌 나를 누군가 흔든다
   나는 내가 아닌데 누군가 나를 흔든다
   조용히 흔들린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차고 기우는 것, 그게
   차다가 기우는 건 아닌데

   만월이 초승달을 낳니,
   초승달이 만월을 낳니

   천장에서 비 새는 듯한 흐린 날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초승달이
   보이지 않는 만월을 또 낳기도 하겠구나








* 최승자 시인의 신작이 나왔다. <쓸쓸해서 머나먼>



2010/01/26 03:09 2010/01/26 03:09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2009/09/10 06:38 2009/09/1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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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신문을 혼자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엔 두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짚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짚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품이 착취사에서 다시 나왔어. 이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가 신문지를 한 장 다시 접는다. 날짜를 보더니)

처 : 당신두 참, 그건 옛날 신문이에요. 오늘 것은 여기 있는데.

교수 : (보던 신문 날짜를 읽고) 오라, 삼년 전 신문을 읽고 있었군. 오늘 신문이나 주시오. (오늘 신문을 받아 가지고 다시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에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엔 두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짚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짚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품이 악마사에서 나왔어. 이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 : 참, 세상도 무척 변했군요. 삼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 이근삼 희곡 <원고지> 中, 1960년


 

 

2009/07/22 18:56 2009/07/22 18:56



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
얼어붙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
그 새는 자기의 존재에 대해 슬퍼해 본 적도 없으리라.

             - D.H.로렌스, <자기 연민(Self-pity)>




2009/06/19 04:28 2009/06/19 04:28

- 아래는 위화 중편소설집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끝부분에 실린,
   작가 위화와 푸른숲 편집자의 서면 인터뷰(2000년)에서 발췌한 부분. 모두 위화의 말.



"어떤 글을 쓰든 글에 담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체험에서 오는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작가의 생리적 나이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경험이다. 훌륭한 작가에게는 때때로 한 번의 타종 소리가 옥중 생활보다 더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나의 중편소설들이 독자에게 가져다줄 불쾌감이나 당혹스러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내 글쓰기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은 입속의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란 어린 시절의 호기심을 늘 품고 있다가 직업적 습관을 통해 이를 표출하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작가는 타고나는 면도 있어야 한다. 어른의 지혜에서 아이들은 지니지 못한 통찰력이 나온다. 상상력이란 작가들만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에게만 있는 통찰력이 그들의 상상력을 다른 이들의 상상력과 다르게 한다. 작가들 사이의 차이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상상력이란 통찰력과 긴밀한 관계를 이룬다. 둘의 관계는 비상(飛翔)과 방향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찰은 상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장악한다. 통찰력이 없는 상상이란 사실 잡생각에 불과하다."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자기 속마음의 구석구석을 조금씩 접하다가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나는 거다. 한 사람의 속마음이란 바로 모든 사람의 속마음을 축적한 것이고, 우리를 둘러싼 하늘처럼 끝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진정한 사람 하나를 그려내는 것이 수많은 군상을 그려내는 것이라 여기는 이유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위대한 작가들은 이미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숲 속의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뛰어넘지 않는다. 나도 그와 같다. 나의 글쓰기는 어느 한 작가를 뛰어넘기 위한 게 아니다. 훌륭한 작가들이 이루는 숲 속에서 한 그루의 새로운 나무로 성장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묘목은 아니고……."




 
2009/04/28 01:06 2009/04/28 01:06

- 생각해보면 시마를 만났던 그날이 운명의 갈림길이었던 것 같소.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나도 젊은 애들에게 자주 그렇게 설교하지만 인생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죠. 운명의 갈림길에는 늘 누군가 타인이 서 있소. 그리고 이쪽으로 오라고 팔을 잡아끌지.
  그 타인이 제대로 된 사람이면 문제가 없는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소.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인간은 신이 대충 성의 없게 정해주는 건지도 모르오. 선악이나 능력 같은 건 전혀 관계없지. 그런 별볼일 없는 인간에 의해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고 마는 거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다고 할 만큼 고마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놈만 없었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평생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
  '키 퍼슨(key person)'이라고 하던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 누가 그런 키 퍼슨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무서운 부분이라오.
  그 시마라는 남자는 특별히 나와 친했던 것도 아니고, 긴 인생 속에서 보자면 잠깐 스쳐간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나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인생이 바뀌어버리고 말았소.


- "물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사람은 있었지요."
  "그런 말이 아니오." 하고 다쓰는 큰 소리로 회장을 나무랐다.
  "미워서가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려 한 적이 있느냐는 거요."
  "그거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렇지. 당신이나 나나, 자신의 자리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항상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거요. 죽느냐 죽이느냐의 갈림길을 몇 번이고 지나왔을 거요. 그 와중에서 다행히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였을까요?"
  "그런 게 아니오."
  다쓰는 뱃속 깊은 곳에서 짜내는 듯한 소리로 내뱉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소. 아까도 말했듯이 인생에는 운이 좋고 나쁘고가 없단 말이오. 당신뿐 아니라 누구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죽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오."
  실내에는 긴장된 고요가 가득했다. 아마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 살인은 정말 어려운 일이오. 나 자신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워. 젊음이란 그런 어려움을 모르지.
  여러분, 누구든지 오륙십 년 넘게 살아오다보면 한 번쯤은 살인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거요. 한두 번은 반드시.
  그런데 왜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겠소?
  운이 좋아서가 아니오. 당신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이오.
  때문에 나는, 세상 사람들 말처럼 야쿠자가 인간 쓰레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말이나 태도로 타인을 죽이는 건 죄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야말로 인간 쓰레기가 아니오?

<사고루 기담>中 '비 오는 밤의 자객' 일부, 아사다 지로作


2009/03/09 10:17 2009/03/09 10:17

- "부모에 대해서는 서류에 별로 나와 있지 않아요. 나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 부모들이 이곳(청소년 감화 교육원)에 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한답니다. 구두 수선공도 남의 구두창을 제대로 갈려면 삼 년을 배워야 해요. 그런데 엄마나 아빠는 누구나 그냥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부모가 된 다음에는, 부모가 되는 어려운 일을 배우려고 조금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자식의 삶을 함부로 결정하거나 규정하게 되죠. 제화공은 구두가 휘거나 비틀리면 가죽을 가지런하게 잘라냅니다. 그리고 아예 못쓰게 된 것은 내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죠. 제화공이 깐깐한 주인을 만났다면 가죽 손실에 대한 손해를 변상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뭔가 잘못되는 경우에는 늘 아이들 탓이 되고 말아요. 그런 아이들이 우리에게 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아이들을 다시 적당히 꿰매 주어야 해요." (192p)


- 굴복하는 게 쉽지 않지만 요헨은 굴복하고 말았다. 도주를 자발적으로 단념했다. 도망쳐 봤자 목적지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요헨은 이곳 감화 교육원이 훨씬 낫다는 걸 더 이상 의심치 않았다. 국도에 혼자 있는 것, 지나가는 경찰들을 피해 몸을 숨기는 것, 지푸라기 속에서 잠을 자는 것 등은 버림받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도망 다닐 때의 자유는 결코 자유가 아니었다. (254p)

<요헨의 선택>, 한스 게오르크 노아크作, 독일, 1970


2009/03/09 09:55 2009/03/09 09:55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이상희

 


세상을 빠져나가려는 중이야
쉬잇 내 말을 들어봐
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다, 시, 는, 돌, 아, 오, 지, 않, 는, 다
다신 돌아와도 찾을 수 없도록
도와줘 데이지, 내 얼굴을 먹어줘
내 의자와 찻잔을, 이름과
구두를 삼키고 동그란 꽃봉오리를
단단히 오므려버려 숱한 풀꽃더미
사이로 숨어버려 새 주소에도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뿌리 없는 나를 향해 다가오고 창문을
열면, 녹슨 모래언덕이 무너질 듯
데이지, 그런데 난 돌아오고
싶을 거야 야수와 포옹할 미녀를 기다리며
끝없이 기나긴 불안의 끄나풀이 되고 말거야
도와줘 데이지, 돌아올 수 없도록
내 생의 사진들을 먹어줘.





 

2009/02/17 17:55 2009/02/17 17:55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
 
              브레히트


1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에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모든 독일 집을 온통 새로 칠했다네.

2
칠장이 히틀러는
말했네,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 구멍난 곳과 갈라진 곳과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 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 버렸다네.

3
오 칠장이 히틀러여
왜 자네는 벽돌장이가 되지 못했나? 자네의 집은
회칠이 비를 맞으면
그 속의 더러운 것들이 다시 드러난다네.
그 똥뒷간 전체가 다시 드러난다네.

4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1933)


2009/02/15 20:41 2009/02/15 20:41


   편지
           백석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들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샘물 같은 눈으로 나는 지금 당신께서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 한폭을 들여다 봅니다. 들여다 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어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앓아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섣달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이 낡은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같이 살아왔습니다.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는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나의 수선이 시들어갑니다. 그는 스물을 넘지 못하고 또 가슴의 병을 얻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만하고, 나의 노란 슬픔이 더 떠오르지 않게 나는 당신의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의 폭을 치워놓아야 하겠습니다.

 밤이 아직 샐 때가 멀고 또 복밥을 먹을 때도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바느질그릇이 있는 데로 가서 무새헝겊이나 얻어다가 알록달록한 각시나 만들면서 이 남은 밤을 당신께서 좋아하실 내 시골 육보름밤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육보름으로 넘어서는 밤은 집집이 안간으로 사랑으로 웃간에도 누방에도 허청에도 고방(광)에도 부엌에도 대문간에도 외양간에도 모두 쩨듯하니 불을 켜놓고 복을 맞이하는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달 밝은 마을의 행길 어디로는 복덩이가 돌아다닐 것도 같은 밤입니다. 닭이 수잠을 자고 개가 밥물을 먹고 도야지 깃을 들썩이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새옷을 입고 복물을 긷는다고 벌을 건너기도 하고 고개를 넘기도 하여 부자집 우물로 가서 반동이에 옹패기에 찰락찰락 물을 길어오며 별 같은 이야기를 재깔재깔하는 밤입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또 복을 가져오느라고 달을 보고 웃어가며 살기같이 여우같이 부잣집으로 가서는 날쌔기도 하게 기왓골의 기왓장을 벗겨오고 부엌의 솥뚜껑을 들어오고 곱새담의 짚날을 뽑아오고…… 이렇게 허물없는 즐거움 속에 끼득깨득하는 그들은 산에서 내린 무슨 암짐승들이 되어버리는 밤입니다. 그러다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음 고요히 세 마디 달린 수숫대에 마디마다 콩 한 알씩을 박아 물독 안에 넣는 밤인데 밝은 날 산 끝이라는 웃마디, 중산이라는 가운뎃마디, 해변이라는 밑마디의 그 어느 마디으 콩이 붙는가를 보고 그 어느 고장에 풍년이 들 것을 점칠 것입니다. 그러다는 닭이 울어서 새날이 아홉 가지 나물에 아홉 그릇 밥을 먹으며, 먹으면 몸 솔쐐기가 쏜다는 김치와 먹으면 김맬 때 비가 온다는 물을 자꾸 머고 싶어하는 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육보름의 아침이 됩니다. 새악시 처녀들은 해뜨기 전에 동리 국수당의 스무 나뭇가지를 쪄오래서 가시가시에 하이얀 솜을 피우고, 그 솜밭 속에 며칠 앞서부터 스물이고 서른이고 만들어놓은 울긋불긋한 각시와 새하얀 할미를 세워서는 굴통담에 곱새담에 장독담에 꽂아놓는데, 이렇게 하면 이 해에는 하루같이 목화밭에서 천 근 목화가 난다고 믿는 그들의 새옷의 스척이는 소리도 좋게 의좋게 짝패들끼리 끼리끼리 밀려다니며 담장마다 머물러서는 목화 따는 할미며 각시와 무슨 이야기나 하는 듯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2009/01/14 13:47 2009/01/1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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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니다

                                박노해


웃는 밥을 먹고 싶다
꿈꾸는 밥을 먹고 싶다
꽃피는 밥을 먹고 싶다
최초이자 최후인 밥상 앞에
내 생명이 불안하다

미친 소가 내 밥상을 짓밟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일상을 옥죄고
아이들의 여린 몸을 파고든다

이제 이 나라 밥상은 갈라졌다
부자들의 안전한 밥상과
우리들의 병든 밥상으로
이 나라 밥상 공동체는 분단되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풀꽃 같은 우리의 삶과
소박한 우리의 밥상과
푸른 오월의 우리 아이들을
미친 소처럼 몰아대는 시대

아이들이 무슨 죄냐
대지에서 자란 우리 말이 아닌 영어부터 먹고
사랑과 우애가 아닌 성적을 먼저 먹고
자기만의 꿈이 아닌 경쟁을 먼저 먹고
돈만 보고 끝도 없이 달려가라 한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미친 소를 타고 달리는
앞이 없는 미래는 끝나야 한다
나는 살고 싶다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이제 더는 부끄럽게 살지 않으리
아이들의 해맑은 눈망울 앞에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리

이 작은 촛불을 밝혀 들고
갈라진 밥상을 넘어
불안과 절망을 넘어
우리들 촛불의 강물로 굽이쳐 흐르며
한걸음 희망 쪽으로 손잡고 나아가리

촛불아 모여라
촛불아 모여라






*
여기까진 박노해 시인의 시였고.
사실 소들도 무슨 죄냐. 인간들 때문에 참 안됐다.
'미친 소가 내 밥상을 짓밟고', '미친 소처럼 몰아대는' 같은 표현들은 껄끄럽지만
퍼왔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리' 때문에.

오늘(5/9)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을 예정이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 ··· 01950752

어머, 저 지금 선동하는 거 아니에욧.
이런 일이 있을 거라구용♥





2008/05/09 01:11 2008/05/09 01:11


흰둥이 생각
                                             
                              손택수


손을 내밀면 연하고 보드라운 혀로 손등이며 볼을 쓰윽, 쓱 핥아주며 간지럼을 태우던 흰둥이. 보신탕감으로 내다 팔아야겠다고, 어머니가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약봉지를 세던 밤. 나는 아무도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 흰둥이 목에 걸린 쇠줄을 풀어주고 말았다. 어서 도망가라, 멀리멀리, 자꾸 뒤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며 아버지의 약값 때문에 밤새 가슴이 무거웠다. 다음날 아침 멀리 달아났으리라 믿었던 흰둥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와서 그날 따라 푸짐하게 나온 밥그릇을 바닥까지 달디달게 핥고 있는 걸 보았을 때, 어린 나는 그예 꾹 참고 있던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흰둥이는 그런 나를 다만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는 것이었다. 개장수의 오토바이에 끌려가면서 쓰윽, 쓱 혀보다 더 축축히 젖은 눈빛으로 핥아주고만 있는 것이었다.









2008/05/06 07:11 2008/05/06 07:11

그해 이학기부터 나는 차밭 한가운데 자리잡은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교회도 없고 목사님도 없었다. 그 대신 낡은 목조 교사와, 내 이름을 성은 생략하고 이름으로만 불러대는 프로 레슬러 같은 선생님이 계셨다. 나로서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 쌀 두 가마니처럼 생긴 선생님은 러닝 셔츠 한 장만 걸친 차림새로 교단에 서서, 이따금 통나무 같은 팔을 이리저리 꺾어 우드득하는 소리를 내어서 아이들을 웃기는 것이었다.

한낮의 쉬는 시간에 나 혼자 자습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휘파람을 불며 다가와, 무릇 아이들이란 반드시 소프트 볼을 해야만 어른이 될 수 있노라고 말했다.

너무나 깍듯한 인사 말씨 때문에 나는 모두의 놀림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별종인 나를 업신여기는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의지박약한 개종자처럼 이렇다 할 수난 한번 겪는 일 없이 그들에게 동화되었다.

놀이시간이나 체육수업 때면 나는 맡아놓고 모두의 짐덩어리였다. 그러나 내가 외야로 날아온 공을 처음으로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냈을 때, 교정과 교실 창문에서는 일제히 박수갈채가 들끓었다. 나는 마치 우승한 야구선수처럼 위닝 볼을 가슴에 품고 센터에서 홈 베이스까지 내내 울면서 달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넓고 넓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 나는 신이 아닌 인간들의 선의에 의해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이윽고 정신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었다.


- 아사다 지로 단편소설, <악마> 중에서






2007/11/26 00:05 2007/11/26 00:05
고대 경영대 거센 개혁바람...등록금 차등책정

고려대 경영대학이 내년도부터 성적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해 '개혁실험'에 대한 논란이 증가되고 있다. 고려대 경영대학에 따르면  2009학년도부터 성적 하위 10~15%인 학생에 대해서는 등록금을 지금보다 두 배가량 높이는 반면 상위 33%에 해당하는 학생에게는 전액 장학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고려대 경영대 관계자는 "이 같은 방안은 교수회의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수 학생 유치를 위해 일단 경영대 내부에서 논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하위 10~15% 학생은 등록금을 현행 346만원에서 두 배인 650만원 수준으로 내야 돼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반면에 상위 3분의 1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또한 중위권에 해당하는 학생은 지금과 동일한 등록금을 책정받을 수 있다.

이번 방안은 실제 적용이 되기까지 재학생은 물론 본부 등 대학 내부 논의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한편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몇 년 안에 고려대 경영대를 아시아 3대 경영대학으로 만들겠다" 며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를 위해 파격적인 실험을 대학에 적용시켰고, 최근 그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영국 '더 타임스'가 선정한 세계 사회과학분야 단과대 순위 66위에 올랐고,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100대 대학' 에 드는 성과를 냈다.  (2007.10.2 / 아시아경제 김수희 기자)



재미난 기사다. 고려대 경영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자라면서 '수재' 소리도 몇 번 들어봤을 테고, 고등학교 때도 전교에서 순위를 다투는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저대로 된다면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면, 거기 모인 학생들 중 하위 10~15%에 드는 순간 그 대가로 등록금을 두 배로 내야 하는 것이다.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몇 년 안에 아시아 3대 경영대학'이 될 곳이기 때문이다. 등록금 인상에 발끈하려던 학부모들도 저 말에 움찔할 수 있을 거다. 똑똑한 우리 아들이 고려대 경영대학에 입학해서 더 똑똑한 애들 때문에 등록금을 두 배 내며 다니는 게 억울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과정을 거치면 고려대 경영대학 출신이 되니까...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다음 학기에 두 배의 등록금을 내게 되어 울분을 터뜨리던 학생도 이내 마음을 추스릴 것이다. 편입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야 고려대 경영대학 출신이 된다. 고려대에서 이런 정책을 검토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실을 학교측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거다. 시쳇말로 '듣보잡' 대학에선 감히 이런 얘길 꺼낼 수도 없을 거다. 잘못 했다간 총장이 석궁테러 받기 십상이지.

역시 소속이란 건 중요하다. 그리고 <경쟁력>이란 단어는 만능 포장재가 될 수 있다.

기사를 읽고 있자니 박민규의 장편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떠올라서 일부를 옮겨본다. 무단 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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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2 12:31 2007/10/02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