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담 공책'에 해당되는 글 99건

  1. (이야기) 그 여자 (6) 2010/09/28
  2. (이야기) 보름달 소원 (4) 2010/09/23
  3. (이야기) 청첩장 (3) 2010/09/20
  4. (이야기) 꿈 2009/10/19
  5. 그, 겨울 (4) 2009/02/17
  6. 물이었네 (2) 2009/02/14
  7. 지평선 긋는 연필 (8) 2009/01/15
  8. 오렌지, 껍질 (7) 2008/11/22
  9. (3) 2008/11/20
  10. 연애 (3) 2008/11/19
  11. (이야기) 악몽 (12) 2008/11/02
  12. (이야기) 밤하늘 (19) 2008/10/17
  13. 계절 2008/10/08
  14. (이야기) 아버지 (9) 2008/10/06
  15. 눈 오는 밤 (14) 2008/09/16


그 여자





내 꿈속엔 사람이 살아요.
내 꿈 안에서 누가 살고 있다니까요.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요. 대체 언제부터 내 꿈에서 살기 시작한 건진 모르겠어요.

어느 날, 꿈을 꿀 때마다 그 여자를 보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꿈을 꿀 때마다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내 꿈에 존재해요.

내가 꿈에서 거리를 걸으면, 그 여자는 길 모퉁이에 서서 나를 보고 있어요.
내가 꿈에서 장을 보면, 그 여자는 저만치서 다른 걸 사는 척하며 나를 흘끔거려요.
내가 꿈에서 바다로 가면, 그 여자는 해변 한쪽에서 조개껍질을 줍다가 나랑 눈이 마주쳐요.
내가 꿈에서 집에 틀어박혀 종일 빈둥거리면, 그 여자는 방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나를 바라봐요.

비현실적인 꿈을 꿀 때도 마찬가지예요.

꿈에서 괴물이 나타나 미친듯이 도망칠 때도
꿈에서 화산이 폭발해 도시가 용암에 잠길 때도
꿈에서 아무 장비 없이 온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때도
꿈에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 혼자 남은 순간조차도
그 여자는 꿈 한쪽에서 나를 보고 있어요.
말 없이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어요.

참 지랄맞게도, 나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에요. 매일 밤 꼬박꼬박 꿈꾸는 것으로 부족해서
하룻밤에 두 세 번씩 꿈꿀 때도 있는 사람이에요.
대체 누구인지, 왜 내 꿈에서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꿈에서의 나는 어쩐지 그 여자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게 돼요.

아, 씨……. 무서워요.

내 얼굴, 볼품 없이 퀭하죠? 밤마다 아주 미칠 것 같아요.
그 여자, 그 표정, 그 눈빛은
내가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게 분명해요.
매일 밤 확인하고 있는 게 분명해요.
내 꿈속에서 사는 주제에, 내 존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구요.
내 꿈에서 나를 쫓아내고,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거라구요.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기도 하고, 깊이 잠들면 꿈꾸지 않는다기에 수면제를 먹어보기도 했지만
모두 효과 없었어요. 나는 결국 잠이 들고, 잠만 들면 꿈을 꾸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악몽을 꾸게 한다는 노인을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들어 본 적 있어요? 그 노인 옆에서 자면 누구든 악몽을 꾸게 된대요.
옆에서 자는 것만으로 평생 상상해본 적도 없는 끔찍한 꿈을 꾸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노인을 제발로 찾아가다니 미쳤다구요? 모르는 말씀이에요.
그 여자가 못 견디고 제 발로 내 꿈을 떠날 때까지, 무시무시한 악몽을 꿀 거예요.

나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요.







2010/09/28 06:50 2010/09/28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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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름달 소원





 내일은 추석입니다. 우리집은 큰집이라 삼촌네 식구들과 막내 고모가 우리집에 왔어요.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얼마나 왔는지 몰라요.

 "자동차가 아니라 배를 타고 온 기분이야."

 삼촌이 오자마자 꺼낸 말입니다.

 "내 평생 이렇게 비 많이 오는 명절은 또 처음이네."

 삼촌의 말에 할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내 평생에도 처음이로구나."

 사촌언니들은 차를 타고 오면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 어땠는지 크게 떠들었어요.

 "장난이 아니었어! 길이 아니라 바다야!"

 "차들이 떠다녔어요! 지나갈 때마다 물이 파바박!"

 나는 종일 집안에 있었지만, 텔레비전 뉴스로 언니들이 말한 광경을 보아서 알고 있었지요. 사람들의 무릎까지, 허벅지까지 물에 잠긴 곳도 있던데요. 언니들은 잔뜩 들떠서 계속 떠들었지만 할머니는 삼촌을 혼내셨어요. 이렇게 궂은 날 무리해서 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잠시 꾸중하시고는 이내 식혜를 내어 오셨어요.

 "친구 자취방에 물이 들어왔다네."

 대학생인 고모는 친구와 한참 통화하더니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어요.

 "다른 애들이 도와주러 가긴 했다는데, 물을 퍼내도 계속 들어오나봐. 고향에 가는 것도 취소했대. 추석 전날에 이게 무슨 일인지……."

 어른들은 뉴스를 보며 피해 입은 사람들을 걱정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명절도 제대로 못 쉬겠구나. 얼마나 속상할 거냐."

 "아이고, 저 물건들 다 물에 잠긴 것 좀 봐. 저걸 어째."

 사실 나는 그때 언니들과 함께, 고모가 데려온 강아지 멍구와 노느라 바빴어요. 고모는 학교 앞에서 혼자 살다가 얼마 전부터 강아지를 길러요. 그런데 빈 집에 며칠씩 강아지를 혼자 둘 수 없다고 데려온 거예요.

 "고모! 멍구 과자 줘도 돼?"

 "안돼!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무 거나 주면 안 돼."

 "그럼 사료 어딨어? 우리가 사료 줄게, 고모."

 "사료는 정해진 시간에 줘야 돼. 시간 되면 알려 줄게."

 아직 어리다는 멍구는 천둥 소리가 무서운지 우르릉, 꽝! 천둥이 칠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 고모를 찾아다녔어요. 모두들 그런 멍구를 보며 깔깔 웃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나도 천둥 소리가 무서웠어요. 몇 시에 칠 건지 미리 알려주고 치면 덜 무서울 텐데, 방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꽝! 울리니까 화들짝 놀라게 되는 거예요. 이 얘기를 했더니 고모가 나를 창문 앞으로 데려갔어요.

 "고모는 천둥이 언제 칠지 미리 알 수 있지롱."

 "정말?"

 "조금만 기다려 봐."

 나는 고모 옆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어요. 잠시 후에 고모가 말했습니다.

 "이제 천둥이 칠 거야!"

 우르릉, 꽈광!

 와,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고모는 어떻게 천둥이 칠 것을 미리 알았을까요? 우와, 우와- 감탄하자 고모가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번개가 먼저 치고, 그 다음에 천둥이 오는 거야. 밖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번쩍! 번개가 치면, 곧이어 금방 천둥이 따라오는 거지."

 "왜?"

 "걔들은 한 세트거든."

 왜 한 세트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고모 말이 맞았습니다. 나는 창문 옆에 붙어 서서 번쩍! 번개가 칠 때마다 재빨리 언니들에게

 "천둥 친다!"

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마다 언니들은 멍구를 끌어안았습니다. 엄마와 숙모는 강아지는 그만 만지고 손을 씻어야 송편 만드는 데 끼워 주겠다고 외치셨어요.
 

 *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그렇게 내리던 비는 밤사이 뚝 그쳐 있었어요. 우리는 차례를 지냈습니다. 차례상에 돌아가며 절을 하고 음식을 나눠 먹었어요. 삼촌네 식구들은 숙모의 엄마 아빠를 보러 간다고 떠났습니다. 다행히 고모는 하루 더 자고 간댔어요. 내가 좋아서 배시시 웃으니까 고모가 말했습니다.

 "너, 고모가 아니라 멍구가 하루 더 있어서 좋아하는 거지?"

 고모는 쪽집게예요. 나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며 웃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 가족은 밖으로 나왔어요. 물론 멍구도 같이 나왔습니다. 어제 그렇게 겁쟁이처럼 웅크리던 멍구는 오늘 밖에 나오니까 아주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었어요. 바람이 조금 찼지만, 날씨는 좋았습니다.

 "올해 추석엔 달을 못 볼 줄 알았더니, 환하게 떴네."

 엄마의 말에 하늘을 보니, 우와! 정말 커다란 달이 떠 있습니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에요.

 "자아, 소원을 빌자. 추석날엔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거야."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식구들은 다들 마음속으로 소원을 비는지 조용해졌어요. 아아, 그런데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금방 끝내셨어요.

 "나는 다 빌었다."

 "벌써요?"

 "평생 소원을 하도 많이 빌다 보니까, 평소에 요약이 잘 돼 있어서 금방 나온다."

 할머니 말씀에 모두 깔깔 웃었어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원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저희 가족 건강하게 해 주시구요, 멍구 같은 강아지 기르게 해 주시구요…….'

하니까 콕 막힙니다. 달님이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더 많은 소원을 빌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소원을 다 빌기도 전에 식구들이 이만 들어가자고 할까봐 마음이 좀 조급해졌어요. 할머니는 소원을 다 빌었다면서도 계속 달님을 쳐다보다가 말씀하셨어요.

 "아무래도 오늘 보름달을 보라고, 하늘님이 어제 서둘러서 구름을 비웠나 보다."

 고모는 오오오- 하면서 할머니를 보며 웃었어요. 나는 드디어 소원 하나를 더 빌었습니다.

 '내년부터는 미리 미리 조금씩 나눠서 구름을 비워 주세요.'









2010/09/23 02:39 2010/09/23 02:39


청첩장




나는 아까부터 청첩장 하나를 앞에 두고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회사로 배달된 청첩장은 특별할 것 없이 흔하게 생긴 것이었습니다.
예비 신랑 신부의 사진, 예식장 약도, 축복을 바라는 글귀까지
뭐 하나 어색할 것 없는 평범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나는 모두 잠든 이 시각까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청첩장에 적힌 이들의 이름이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나는 일전에 기억을 먹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술에 취해 골목을 헤매다가 그 아이와 마주쳤고
기적처럼, 원치 않는 기억들은 모두, 그 아이가 먹어 주었습니다.
동이 터서 그 골목을 뜰 당시엔, 세상에서 가장 홀가분한 사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적이었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어나서 받아 본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었어요.

그런데 아뿔싸,
나는 그만 가장 중요한 기억을 먹어달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아이가 내 기억을 먹어 주었다는 기억도
함께 먹어 달라 부탁해야 했던 것을.

나는 그 아이가 어떤 기억들을 먹어 주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차마 기억하기엔 괴로웠던 기억들, 깡그리 버리고 싶던 기억들이었을 것이다-
라고만 짐작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까부터 이 청첩장에 적힌 이름들을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라면, 그 아이가 먹어준 이름일 테니까요.
그동안 함께 일했던 사람들부터 거래처 직원들, 학교 동창들, 멀고 먼 친척들까지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이 이름들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아시겠어요?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깡그리 버리고 싶던 걸까요.
무슨 기억이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걸까요.
지금 청첩장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새로운 출발을 축복해주길 바라는 이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기억을 만들어 주었던 걸까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기억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의심하며 살게 되는 걸까요?









2010/09/20 02:01 2010/09/20 02:01





잠잘 때, 나는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갑니다.
자동차를 얻어 타듯 남의 꿈에 들어가
그의 꿈을 함께 겪는 것이죠.

내가 어릴 적,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휴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낮잠을 자며 꾼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꿈에서 커다란 돼지를 본 아버지는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고 있었고
이야기를 듣는 식구들도 덩달아 조금씩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채만한 돼지 위에 나랑 막내랑 올라타서 우리 동네를 벗어난 다음에,
가만, 그리고 어디로 갔더라?"
"약국 삼거리로."

갑자기 내가 끼어들자 아버지는 잠시 놀랐지만, 우연히 맞춘 것이려니 하셨지요.

"맞아. 삼거리로 나갔어. 그런데 이놈의 돼지 새끼가 거기에서 딱 멈추더니."
"돼지가 갑자기 앉아 버려서, 아빠가 돼지를 막 때렸어!"

나는 신이 나서 내가 본 장면을 크게 떠들어댔습니다.
아버지는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너 그걸 어떻게 아냐?"
"같이 있었으니까."

나는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허허, 이 녀석 봐라. 아빠 꿈에 네가 나왔다고, 꿈 내용까지 안다는 거냐?"

식구들은 깔깔 웃었습니다.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죠.
내가 아버지의 잠꼬대를 듣고 아는 체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식구들의 꿈에 대해 아는 체하는 일이 계속되자,
이윽고 식구들도 내 말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식구들은 꿈을 꾼 다음 날 아침이면, 자기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맞춰 보라며 재촉했습니다.
내가 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식구들은 깜짝 놀랐고,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더욱 신나게, 더 자세히 이야기하곤 했지요.
언젠가부터 아침마다, 간밤에 꿈을 꾼 식구가 나를 붙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꿈에 보인 숫자들이 가물가물하면 내게 물어보고 복권을 사러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간밤에 잠시 인사한, 세상을 뜬 친척이 누구인지 알려주었습니다.
누나는 종종 자기가 기억 못한 꿈이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형은 하늘을 날던 자기의 모습이 멋지지 않았냐며 으스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들 나를 껄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은 참 기이한 것 아닙니까.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게 꿈 아닙니까.
마음대로 꿀 수 없는 게 꿈 아닙니까.
아버지는 이웃 여자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만났던 남자와 밀회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누나는 식구들이 모두 죽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시로 나가는 꿈도 꾸었습니다.
형은 학교 선생들을 때려 눕히고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그런 꿈을 꾼 식구는 다음 날 아침에 나를 못본 체했습니다.
식구가 그런 꿈을 꾼 다음 날이면 나도 우울한 심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대체 누가 무슨 꿈을 꾸어서 애 표정이 저 모양이냐고 화를 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꿈에 어떤 여자들이 나오는지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누나는 자기 꿈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형은 눈을 부라리며 나를 겁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식사 시간은 점점 말이 없는 조용한 자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식구들의 꿈을 못보게 된 척 하기도 했지만,  꿈속에서 완벽하게 숨지 못하고 자꾸 들키고 말았지요.

"저놈은 개가 꾸는 꿈도 엿볼 거야."

어느 날 아침, 형은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내뱉었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가 기르던 개의 꿈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싶었습니다.
우리 개는 밤마다 현관문을 직접 열고 집을 나가, 마음껏 뛰어놀다 들어오는 꿈을 꾸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얘길 꺼낼 수는 없었지요.

"괴물이야, 저 새낀."

형이 계속 떠들었지만 아무도 막지 않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남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곤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안 형편이 나아져서 방 세 칸짜리 집으로 이사하자, 식구들은 가장 어린 나에게 독방을 따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의 기숙사가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부터는 기숙사 학생들의 꿈에 들어갔지요.

더이상 가족의 꿈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기뻤지만
기숙사 생활 첫날부터 같은 방 아이들의 꿈들에 시달렸습니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남자 아이들은 음란하고 난폭하고 괴상한 꿈을 꾸기 일쑤였습니다.
행여라도 아이들이 한꺼번에- 내가 모두의 꿈에 나타나고 있다는 걸 눈치채는 일이 벌어질까봐
나는 수많은 여자와 귀신과 별 희한한 싸움들을 피해가며 요리조리 숨어 다녔답니다.

더욱 곤란했던 것은, 매일 밤 온갖 꿈속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이들과 대화하다가 무엇에 대해 아는 체를 하면, 상대방이
"어? 그건 내가 꿈에서 한 행동인데" 라고 당혹스러워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던 것이지요.
결국 나에 대해 눈치채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재수 없는 놈이라며 화장실에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날, 나는 졸업할 때까지 수업 시간 외엔 한번도 입을 열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습니다.

그 후의 일들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되실 겁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수면제를 많이 먹고 곯아떨어져 봤지만 소용 없었습니다.
밤낮을 억지로 바꿔 보려고도 했지만, 밤이 되면 나는 여지없이 잠에 빠지고
옆에 있는 누군가의 꿈속을 거닐고 있었던 겁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청년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도저히 함께 밤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어딘가엔 내가 모두 보아도 서로 곤란해지지 않을- 아름답고 고요한 풍경만 꿈꾸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만은
꿈은, 욕망과 금기와 무질서가 뒤섞이는 것이더군요.

이제 더이상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들 말처럼, 나는 괴물이니까요.

그러니 어르신, 제발 하룻밤만이라도 댁에서 자는 것을 허락해 주셔요.
어르신 옆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누구든 악몽을 꾸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어떤 끔찍한 꿈이라도 좋습니다. 그 꿈 때문에 미쳐 버리게 된대도 상관 없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닌
내 꿈을 꾸어보고 싶으니까요.






2009/10/19 02:40 2009/10/19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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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너는 항상 겨울을 살았지
나는 봄이 오면 봄을 살고
여름엔 여름을 살아야 했네

불안해서 노래하던 날들이었지
누군가 칭찬해 주어도 기쁘지 않았네
네가 눈치채지 못하였으니

많은 다짐을 쏟아내었지
다짐이 느는 건 좋은 게 아니었네
다짐은 강물에 간신히 띄우는 나무조각이었네
다음 걸음을 걷기 위해 던지는 징검다리였네

누군가에겐 아름답지 않아 미안했고
누군가에겐 아름다워서 미안했지
너에겐 모든 이유로 미안했고
너에겐 모든 이유로 화가 났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네
너는 그리워하기 위해 멀리 간다는 거짓말을 했지
나는 자꾸 검은 문을 열고 싶었고
기다리던 전화가 올까봐
입을 틀어막고 전화를 받았지






2009/02/17 22:52 2009/02/17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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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었네



얕게 일렁이기 보다는
깊게 출렁이는 게 좋아 보였지.
바닥을 치고 올라와야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믿었네.
의무에 가까운 마음으로 진흙을 껴안았지.
흙탕이 된 것을 으스대기도 했네.

아주 잠시 반짝이는 수면이 되어 보기도 했지.
따뜻한 저 햇볕을 일년 내내 쬘 수도 있다고
누군가 얘기했지만 자신 없었네. 저 배, 저 바람, 비구름, 나를 할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며
겁내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더 거칠고 빠르게 아래로 달렸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타는 사랑 때문에
곁에 있는 거라 말해 달라고, 물고기에게 애원하고
대답을 듣지 못한 밤엔 입 없는 수초의 뺨을 갈기며 분풀이하다
모든 것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오면
지쳤다는 거짓말을 하며

한번 더, 이번엔 예전의 나를 잊어버리게,
모두 나를 쳐다보게, 더 크게, 더 깊게,
살아 있어 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오직 출렁이기 위한 에너지, 출렁임을 위한 출렁임으로,
출렁이던 나는, 물이었네.




2009/02/14 02:42 2009/02/14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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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긋는 연필



지평선 긋는 연필이 있으면 좋겠네.
하늘 아무데나 슥슥 선을 그으면 바로 거기가
지평선 되어 해를 감추고 달을 뱉는.
오후 두 시, 한창 높이 뜬 해 바로 아래 선을 긋는다, 그러면 내가 그은 지평선으로
해는 금세 발갛게 넘어가겠지.
언제든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는 건 덤이라 하자, 그렇게 밤을 부르면 이제
달의 움직임에 따라 지평선을 자꾸만 뒤로, 슥슥 긋는다.
달은 평소보다 오래 하늘을 돌아야 할 거고
나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이밤이 유난히 길어
너와 오래도록 함께일 수 있어 좋다고.





2009/01/15 22:00 2009/01/15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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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껍질



오렌지를 사랑했어요

오렌지를먹을때껍질째먹는사람있나요오렌지를먹고싶으면단단한껍질을벗겨야하죠껍질도벗기지않고핥아보니맛없다고투덜거리면누구도이해하지않을거예요오렌지를날로삼키려든다는핀잔이나듣겠죠껍질이아무리두터워까다로워도손톱을꾹눌러박아벗기는수고를해야,

오렌지를 먹을 수 있는데

오렌지를만날때마다그짓을되풀이해야했던거예요이전에깐건아무소용없었죠까놓고돌아서면껍질은그새또고스란히재생되어있었어요발끈해도소용없는건껍질이있어야오렌지니까껍질을벗겨야오렌지니까연약한속살과향긋한내음을지켜주는껍질은어쩌면오렌지의모든것,

오렌지를, 그, 껍질까지, 사랑해야 했는데

오렌지를난자꾸벗기기만했어요넷으로다섯으로나누어손가는대로갈기갈기벗겼어요벗긴껍질은주저않고버렸죠그래도되냐고오렌지에게물어본적도없죠날욕해도상관없지만오렌지탓도있어요한번도말리지않았으니깐아무렇지않은듯다시단단한껍질을척두르고나왔으니깐,

오렌지를, 뼛속까지 오렌지가 아니라 껍질까지 오렌지였던 오렌지를, 그

오렌지를.




2008/11/22 23:21 2008/11/22 23:21
from ---------------글담 공책/시 2008/11/20 23:20



 



뺨에 닿은 눈, 녹으며 말하네.
사라질 것이다.
나 이리 사라지듯 너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고통도
사라질 것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품고 감고 달고 밟고 숨긴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너는 그 대부분을 기꺼워하겠지만 그 안도도
사라질 것이다.





2008/11/20 23:20 2008/11/20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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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너를 나에게
바느질하는 것.

한 땀 한 땀 너 를
내 심장에 박는 것 기억에 박는 것

헐거워지는 널 붙들어 실을 팽팽하게 잡아 당기고
떨어진 조각은 다시 깁는 것

어느 날 네가 단번에 뜯겨 나가 고통스러운 자리엔
바늘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 남는 것

네가 흘리고 간 살과 피를 남김 없이 주워
내 몸에 자꾸 기워 보는 것, 그러고도 황량히 남은
네가 없는 내 몸에 빈 바느질을 계속하는 것.




2008/11/19 02:43 2008/11/19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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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내 태몽은 귀신이었네.
어머니는 나를 밴 아홉 달 내내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다가
나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쇠약으로 돌아가셨네.

나는 나와 같은 공간에서 잠자는 그 누구라도
소름끼치는 악몽을 꾸게 만드는 사람이라네.

아버지를 비롯해 그 어떤 친지도 나를 데리고 살려 하지 않았네.
어릴 적 학교에서 간 수학여행에선
첫날 밤부터 자다 일어나 울부짖는 아이들로 숙소가 아우성이었네.
군대에서도 쫓겨났네. 사고와 자살이 속출했으니 당연한 조치였네.
버스나 기차를 탈 수 없네.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네.
구멍가게 안쪽에서 주인이 졸고 있으면, 전화를 걸어 깨우고 들어가네.

주어진 명줄이 있으니 어찌어찌 살아왔지만 너무나 외로웠네.
나는 누구의 옆에서도 잠들 수 없네.
잠든 누구의 옆에도 있을 수 없네.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개를 데려온 적이 있네.
개는 며칠 밤낮을 깨갱거리다 끝내 달아나 버렸네.
금붕어는 어항 밖으로 뛰어나와 죽는 편을 택했네.

사랑을 할 수 없었네.
연정을 품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났네.
밤을 보내면 밤을 보내서 떠났고
밤을 보내지 않으면 밤을 보내지 않아서 떠났네.

내 평생 다른 소원을 가져본 적 없네.
소원이라곤 단 하나라네.
누군가를 안고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자고 싶네.
누군가와 평화롭고 조용한 밤을 보내고 싶네.
사랑하는 여인이 자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천천히 쓰다듬어 보고 싶네.

내가 마을과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이렇게 깊은 숲속의 밤인데
이야기하는 동안 이 주위에서
부엉이며 산짐승,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네.

자, 여행으로 지친 자네
오늘 밤 근방에서 딱히 잘 곳이 없다는 건 알지만
하룻밤도 재워줄 수 없다고 거절한 건 그래서라네.
그러니 부디 야박하다 생각하진 말길 바라네.





2008/11/02 19:25 2008/11/0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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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할머니와 동네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밤하늘은 아주 어두워서,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봐야
반짝이는 작은 별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늘이 까매요, 할머니."

"그게 말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엔 지금처럼 밤하늘이 어둡지 않았단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살아 계시던 때 말이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기억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처럼 어두운 밤하늘이 되었단다."

"기억을 버려요?"

"그래. 세상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람들이 버린 기억들도 많아지기 시작했지.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거나 짐이 되는 기억들을 잘라내서 버리곤 한단다.
하지만 그런다고 완전히 버려지는 게 아니거든.
기억이란 건 그렇게 버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란다.
버려진 기억들은 조용히 하늘에 올라가, 어두운 별이 되어 박힌단다.
어두운 별이 점점 더 촘촘히 하늘에 박히기 시작하면서
밤하늘이 더욱 어둡고 무거워졌지.
그리고 그 별들은 자기를 버린 사람을 조용히 내려다 보는 거야.
그래서 모두 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다가도
어느 날 밤 언덕길을 오르는 두 어깨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는 거란다."

"아아……. 그러면 어떻게 하죠, 할머니?"

"걱정하지 마라, 얘야. 마음이 있으니 괜찮다.
살아가면서 네 마음이 조각조각 부서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럴 땐 다시는 그 조각들을 이어붙일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지.
하지만 마음이란 것도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란다.
어느 순간 다시 이만큼 자라 있는 걸 발견하게 되는 거야.
잘 자란 마음은 깨진 조각마저 하나하나 다시 온전한 마음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기도 할 정도니까.
그럴 땐 어두운 별들이 아무리 네 어깨를 눌러도 괜찮은 거야."

"할머니도 그러셨어요?"

"그럼. 네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동안 늘 그런 마음이었지.
할아버지의 마음이 할머니에게 와서 잘 자라주었거든."

나는 할머니의 손을 꼭 쥔 채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저 까만 하늘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빛을 내지 않는 어두운 별들이 나를 무섭게 내려다 보는 것 같았지만
이내 안심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셨으니까요.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도 내 마음을 주었으니
너는 아무 걱정 말아라, 아가."





2008/10/17 22:55 2008/10/17 22:55



계절



사람들의 눈빛으로 계절을 기억해.
차가운 여름 따뜻한 겨울
스산한 봄이 지나갔어.

사람들의 몸짓으로 계절을 기억해.
손짓과 함께 흩어진 가을
그런 날이 아마 있을 걸.

나의 계절을 그려 줘.
떠올려도 아프지 않을 풍경을 그려 줘.

나의 계절로 남아 줘.
쉽게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줘.

나의
계절이 되어 줘.

(08.10.8)






2008/10/08 17:35 2008/10/0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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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는 풍선을 타고 다니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풍선을 타고 어머니에게 날아왔을 때,
당연하게도 어머니는 무척 놀란 한편
머리에 묶고 있던 긴 끈을 풀어, 엉겁결에 아버지를 나무에 묶었습니다.
그날은 더할 나위 없이 이상한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 공원 의자에 앉아 있던 어머니에게
기억을 먹는 아이가 다가와 어머니의 기억들을 먹고 사라지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풍선을 타고 다니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니 말입니다.

아버지는 나무에 묶인 채로 한숨을 돌리고, 어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풍선에 매인 몸이 되어, 풍선이 날아가는 대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모처럼 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어머니는 당신의 손목에 아버지의 손목을 묶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창 틈으로 들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기 쉬웠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날아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고 신경 써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식탁에 매여 식사했습니다.
침대에 매여 잠을 잤습니다.
어머니의 다리에 매여, 태어나는 저를 받았습니다.
어딘가로 외출할 때면 어머니의 손목에 매여 걸었습니다.

풍선을 타고 다니는 아버지를 모두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두 분은 행복했습니다.
오히려 풍선 덕에 다른 부부보다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는 시간은 두 분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두 분이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혼자 외출을 할 때면, 아버지는 꼼짝없이 집안 어딘가에 묶여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일할 수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일하러 다니기 시작하자
처음엔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어머니를 기꺼이 기다리던 아버지도
언젠가부터 그 시간을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날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거실 탁자에 묶어두고 외출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는 울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다시 날아다니는 편이 낫겠어.”
“그렇지만 여보. 당신은 날아다니면서 너무 지쳐 있었잖아요.”
“그래. 하지만 이렇게 늘 여기서, 당신이 오기만 기다려야 하는 게 더 힘들어.”
“그렇다면 이제부턴 어디든 함께 다녀요. 언제나 당신과 함께 다닐게요.”
“여보. 그건 풍선을 타고 다니게 되는 것보다 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잖아.”
어머니는 우는 아버지를 붙들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현관 문을 활짝 열어놓은 다음
잠든 아버지를 침대에 묶어놓았던 끈을 조용히 풀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채로 어디론가 날아갔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기에,
어릴 적부터 듣고 또 들어온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발견한, 화장대 서랍 안쪽에 곱게 개켜 있던 낡고 긴 끈이
바로 아버지를 묶고 있던 끈이 아닐까 상상해볼 따름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풍선을 타고 다녔다면 말입니다.






2008/10/06 18:08 2008/10/06 18:08



눈 오는 밤




눈 오는 밤 나귀 타고 굽이굽이 가시는 님
오실 때 길 잃을라 쌓이는 눈 미워서
발자국 덮지 못하게 조심스레 솔질하네.

나귀야 힘을 내라 네 발자국 너무 얕다
눈 녹기 시작하면 어찌 찾아 오려느냐
우리 님 오실 때까진 해도 뜨지 말거라.





(*모티프-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2008/09/16 22:00 2008/09/16 22:00